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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믈리에서 노숙자가 된 파리 남자의 ‘밑바닥 생활기’
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
크리스티앙 파쥬 지음·지연리 옮김
2020년 04월 10일(금) 00:00
사르트르 등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 ‘드 폴로르’가 자리한 파리의 생제르망데프리는 세상 사람들이 ‘현자’라고 부르는 노숙인 ‘질’의 터전이기도 했다. 포장용 종이 박스로 만든 작은 집에서 포도 찌꺼기를 물에 타서 만든 음료 피케트를 홀짝거리면서 조언을 구하러 온 파리 정치대학 학생들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디오게네스와 흡사했다. 파리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목수정 작가는 파리를 ‘양아치와 현자가 공존하는 거리’라고 말한다.

파리 유명 레스토랑의 소믈리에에서 노숙자의 나락으로 떨어진 한 남자, 크리스티앙 파쥬가 써내려 간 기록을 담은 ‘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가 출간됐다. CNN 등에서 ‘트워터 하는 노숙인(@Pagechtis75)’으로 소개되기도 한 그가 펴낸 이 책은 2015년부터 3년 반동안 거리에서 삶을 보내며 트위터에 연재한 글과 삶을 엮은 자전적 에세이다.

인구 6500만명의 프랑스에서 노숙인은 14만명으로 추산된다. 소믈리에로 잘 나가던 저자는 어느날 아침 아내에게서 이혼통보를 받고, 집마저 없어진 상태에서 노숙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에게 20~30㎏짜리 배낭은 집과 같았다. 왼편 주머니는 책 한권, 수성펜, 노트가 들어있는 서재였고, 맥주와 참치 통조림, 화장품이 든 오른쪽 주머니는 주방이자 파우더 룸이었다. 배낭의 제일 밑 칸은 침낭 두 개와 깔개가 들어 있는 침실이었고 갈아입을 옷 한벌과 양말 한 켤레 등을 넣은 중앙 공간은 드레스룸이다.

‘나를 맞이한 곳은 지옥이었다’, ‘흔들리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인생’, ‘아름다운 별을 보며 잠드는 것’, ‘내 삶의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등 5장으로 구성된 책은 자신의 감정과 삶을 비롯해 술주정뱅이, 좀도둑, 가출한 아이들, 선교사의 요리사, 따뜻한 마음을 함께 나누는 정원사, 도움을 아끼지 않은 착한 사마리아인 등 거리에서 만난 다채로운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밑바닥 생활기’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때론 비참하고 아프지만 그 속에서도 그가 놓치지 않는 건 유머와 풍자다. “노숙인에게 가장 위험한 건 사람이지만, 다친 영혼을 회복시켜주는 것 역시 사람이라는 것, 거기서 온기를 전해받고 남은 온기를 타인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목수정의 추천사처럼 저자는 삶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노숙인들도 우리가 보듬어야 할 사람임을 이야기한다.

3년 반의 노숙인 삶을 ‘살아내며’ 더 이상 무거운 배낭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밤이면 위협받을 걱정 없이 잠들 수 있는 아주 작은 집을 갖게 된 그는 ‘오늘밖에 없던 나에게 내일이라는 희망이 생긴 것을 의미하는 냉장고를 구비하고’ 실패한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중이다.

<김영사·1만4800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