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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거리
2020년 04월 03일(금) 00:00
나 태 주 시인
예전, 젊어서 고향에 살 때의 기억이다. 금강 하구 철새 도래지로 가끔 청둥오리 사냥을 가는 젊은 축들이 있었다. 그들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백조에 대한 것이다. 백조는 우리말로는 고니라고 불리는 몸집이 크고 털 빛깔이 새하얀 새이다. 녀석들은 갈대숲이나 습지에 무리 지어 앉아 있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어김없이 사람이 다가간 거리만큼 뒤로 물러난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한 방책이다. 말하자면 생명의 거리인 셈이다. 동물치고는 참 영리하고 똑똑한 녀석들이라 하겠다.

인간 세상도 그렇다. 아무리 좋은 사이라 해도 너무 거리가 가까우면 진력이 나고 싫증이 나게 되어 있다. 좋은 사이,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려면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친구나 이웃이나 직장 동료 사이도 그렇고 심지어 애인 사이도 그렇다. 가까운 사이, 좋은 사이일수록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세심한 조심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집에 사는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상호 존중할 것은 존중하고 삼갈 것은 삼가고 눈감거나 비켜 갈 것은 또 그래야 한다. 그러기에 옛날 어른들도 부부유별이라 했다. 부부 사이는 구별이 안 되는 밀접한 인간관계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것은 매우 평범하고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기에 더욱 귀중한 교훈이라 하겠다.

오랫동안 사람들과 사귀면서 내가 지키고 있는 원칙 같은 것이 있다. 누구하고든 거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특히 좋은 사람, 내가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지만 지나칠 정도로는 가까이 가지는 않는다. 하고 싶은 말도 모조리 하지는 않고 조금은 아껴 둔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미온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연유로 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나빠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오래 만나지 못하고 헤어져 있는 동안에도 좋은 느낌으로 그 자리에 그냥 멈추어 설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좋은 관계로의 새로운 복원이 가능하다. 이것을 나는 사랑의 거리라고 말하고 싶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말은 생텍쥐페리의 말이다. “사랑은 둘이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아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관계로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 사이를 말해 주는 것도 같다.

미투 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사람들 관계가 많이 소원해진 경향이다. 언어 폭력이든지 성추행이란 말까지 나돌아 특히 남녀 사이가 많이 경직되어 있다. 사랑한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은 얼마나 따스한 말이고 좋은 말인가. 그러나 그런 말조차도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그야말로 이것은 마음의 거리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사랑의 거리가 아니고 강제로 만들어진 마음의 거리다. 왜 우리가 이 좋은 세상을 살면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살게 되었는가. 많이 서글픈 마음이다.

최근엔 코로나19 전염병 때문에 사회적 거리란 것이 다시 생겨났다. 일상의 평범한 삶은 멈추고 갑자기 이상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우리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삶과 살아보지 않은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신종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거리를 두어야 하고 신체적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방책이다. 우리 풀꽃문학관만 해도 계속 휴관 중이다. 뜨문뜨문 관광객들이 오고 아는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갑지가 않다.

멀리서 바라보며 인사하고 좋은 시절이 오면 다시 오시라 인사를 보낸다. 물론 악수도 하지 않고, 사진도 같이 찍지 않고, 책을 들고 와 사인을 해달라고 해도 다음에 하자고 미룬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참 많이 소원해진 느낌이다. 어쨌든 다 좋다. 고니들에게는 생명의 거리. 나에게는 사랑의 거리. 미투 사태에는 마음의 거리. 코로나19에는 사회적 거리. 모든 거리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음의 단절이 있을 수 있고 소통의 부재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 모든 ‘거리’들이 사람을 살리는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금쯤 섭섭함과 공허함과 불편함이 있겠지만 그것들을 넘어서 생명의 거리, 소생의 거리, 끝내는 사랑의 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