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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증공, 북송 정치인…당송팔대가의 일인

2020년 03월 03일(화) 00:00
<초당대총장>
증공(曾鞏, 1019~83)의 자는 자고(子固)로 현 강소성 남풍현에 해당하는 건창 남풍 출신이다. 북송 인종, 영종, 신종 때 활약한 정치인으로 왕안석, 유종원, 소식 등과 함께 당송팔대가의 일인이다. 증조, 증포 등 증씨 형제와 더불어 남풍칠증(南風七曾)으로 불리운다.

12세때 육론(六論)을 쓸 정도로 영민했고 시문에 능했다. 과거에 늦게 합격해 관직 진출이 늦었다. 1057년 소식, 소철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시험 주재관이 구양수였다. 그 인연으로 구양수가 주창한 고문(古文) 부활운동에 일익을 담당했다. 형식미에 치우친 변려문 대신에 창작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고문을 부활하려는 운동에 왕안석, 소식, 소철 등과 함께 적극 참여했다. 태평주 사법참군을 거쳐 중앙에서 편교사관서적, 관각교감, 집현교리, 영종실록검토관으로 재직했다. 지방관으로 나가서 월주와 통주의 통판, 제주, 양주, 혼주, 박주 등의 지주를 역임했다. 부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존경을 받았고 치적을 올렸다.

월주의 통판(通判)으로 재직 중 흉년이 들었다. 관이 보유한 상평창만으로는 백성을 구휼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부유층을 불러 15만석의 식량을 확보했다. 이를 상평창 가격보다 약간 높게 백성들에게 팔았다.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고 곡식 가격도 오르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종자도 대여해주어 농사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였다.

제주 지주로 재직할 때는 도적이 성행하는 것을 막고 백성들에게 너그럽게 대했다.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편안해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공직관이었다. 갈우라는 도둑이 민간을 많이 괴롭혔는데 어느날 스스로 관아에 출두했다. 그를 후하게 대해 휘하의 도적들이 자수토록 유도했다. 제주의 풍속이 거칠었지만 지방 유력자들이 전횡하지 못하도록 해 도적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신법개혁이 반포되자 요령 있게 실시해 백성들에게 부담이 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황하를 준설하는 업무가 떨어지자 장부에 누락된 사람들을 찾아내 공사에 투입해 비용을 크게 절감했다. 교량도 부설해 물자와 사람간 이동이 편하도록 하였다. 역참(驛站)도 적절히 통합해 비용을 줄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려하자 백성들이 다리를 끊고 문을 걸어 닫아 못가게 하였다. 야간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가 부임한 주들은 풍속이 거칠고 유지들의 입김이 강해 다스리기가 어려운 곳이 많았다. 그가 부임해서는 명령이 정확히 집행되었고 서리들이 소관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업무가 지체되지 않고 감옥에 수감된 죄수도 크게 줄었다. 처음에는 그의 조치가 엄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하게 느꼈다.

인종때 요나라에 대한 세폐나 관리에 대한 녹봉 등으로 국가재정이 어려워지자 경비를 줄여야 한다고 상주했다. 인종은 그의 의견이 옳다며 받아들였다. 신종이 그의 자질을 높이사 “증공은 사학(史學)에 자질이 있다고 사대부 사이에 평판이 나 있으므로 이전 황제의 역사 편찬을 담당시켜야 한다”며 수찬으로 기용했다. 편찬을 완료하기 전에 중서사인으로 발탁되었다. 하루에도 수십명의 관직이 제수되는데 업무를 잘 처리했다. 조정 중신들이 삼대(三代)의 풍모가 있다고 칭찬하였고 신종 또한 높이 평가하였다.

신종이 왕안석에 대해 하문했다. “경은 왕안석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인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는 답하기를 “왕안석은 문학과 의지는 뛰어나지만 인색합니다. 그런 점에서 옛 사람만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종이 반박하기를 “왕안석은 부귀를 가볍게 여기는 인물이오. 인색하지 않소.” 증공이 답하기를 “왕안석은 행동에는 용감하지만 허물을 뉘우치는데는 인색합니다.” 신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안석과 함께 신법당의 일원이었지만 신법이 너무 급하게 시행되는 것에 반대했다. 왕안석에게 편지를 보내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인품이 수수하고 권력을 탐하지 않아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시문집으로 원풍류 50권, 녹원풍류 40권, 융평집 30권이 전해진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