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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은 아무나 하나
2019년 12월 10일(화) 04:50
침어낙안(沈魚落雁)은 미인(美人)을 형용(形容)하여 이르는 말이다. 어찌나 미모가 뛰어났던지 물고기가 부끄러워 물속으로 몸을 감추고, 날던 기러기는 날갯짓을 잃은 채 그만 땅에 떨어진다는 뜻이다. 폐월수화(閉月羞花)란 말도 있다. 달은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고, 아름다운 꽃마저 가만히 잎을 말아 올려 제 몸을 감출 정도라는 것이다.

이는 모두 중국의 4대 미녀와 관련이 있다. 먼저 춘추시대 월(越)나라 미인으로, 오(吳)나라 패망의 원인이 된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주인공 서시(西施). 어느 날 강변에 앉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강물에 비치는데, 그 모습을 본 물속의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그녀가 얻게 된 배경이다.

다음은 팔방미인이었으나 뇌물을 바치지 못해 추녀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주인공 왕소군(王昭君)이다. 한(漢)나라의 궁녀였던 그녀는 화친을 위해 북쪽 흉노 왕에게 보내진다. 이윽고 먼 타국 땅으로 시집가던 날. 그녀는 찢어지는 슬픔을 비파 연주로 달래는데, 그 미모와 아름다운 음색에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그만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낙안(落雁)의 고사(故事)다. (물론 중국의 장자(莊子)는 여인들이 아무리 예뻐 봤자 새들은 놀라 날아가고 물고기는 두려움으로 물속 깊은 곳에 숨는다 했지만.)



제 분수 모른 채 흉내 내봐야



초선(貂蟬)은 중국의 4대 미녀 중 유일한 가상 인물이다. 한(漢)나라 대신 왕윤(王允)의 수양딸로 삼국지에 나온다. 하루는 초선이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본 왕윤은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네. 달이 부끄러워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초선은 폐월(閉月)이라 불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당(唐)나라 현종의 며느리이자 후궁이었던 양귀비(楊貴妃)다. 풍만한 몸매의 절세미인인 그녀가 어느 날 화원을 거닐다 무의식중에 함수화를 건드리게 됐다. 그러자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그만 꽃도 부끄러워하며 잎을 말아 올렸다는 것이다. 그녀의 별명이 ‘수화’(羞花)가 된 사연이다.

이들 네 미녀 중 서시(西施)는 ‘효빈’의 고사로도 유명하다. 본받을 ‘효’에 찡그릴 ‘빈’이니, 직역하면 ‘눈살 찌푸리는 것을 본뜬다’는 뜻이다. 서시는 아마도 속병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리거나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 한다. 하지만 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예쁜 법. 게다가 찡그리면 그 모습이 더 매혹적일 수도 있다. 월나라 처녀들은 이걸 몰랐던 것일까. 어떤 추녀가 그걸 보고 자기도 찡그리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생각해 항상 찡그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효빈’은 자기 분수(分數)도 모르고 남의 흉내를 냄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한데 그러한 월나라 추녀들의 모습을 나는 요즘 정치판에서도 심심찮게 확인하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필리버스터니 릴레이 단식이니 바로 생뚱맞기 짝이 없는 제1야당의 치열한 ‘반독재(?) 투쟁’이 그것이다. 필리버스터는 ‘해적선’ ‘약탈자’라는 뜻의 스페인어 ‘필리부스테로’(filibustero)에서 유래된 말이다. 의회 안에서 주로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합법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 국회법에는 ‘무제한 토론’이라고 명시돼 있다.

필리버스터 하면 우선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필리버스터를 시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964년 당시 초선이었던 김대중 의원은 동료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의 구속동의안을 무산시키기 위해 무려 다섯 시간19분 동안 원고도 없이 발언했다. 당시 김 의원은 여당인 공화당이 한·일 협정 협상 과정에서 1억3000만 달러를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본회의에 상정된 김 의원 구속 동의안은 DJ의 연설로 통과되지 못했는데, 발언 시간이 길었음에도 내용이 논리정연했다고 한다.

필리버스터는 바로 이럴 때 하라고 있는 것이다. 아무나,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식도 마찬가지다. 단식 하면 또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YS는 5·18민주화운동 3주년인 1983년 5월18일부터 6월9일까지 무려 23일 동안이나 단식을 벌였다. 그는 단식 시작 전 성명서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5개 민주화 요구 사항’을 발표했다. YS의 단식은 DJ가 연대 의사를 밝히면서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의 계기가 됐다. DJ도 평민당 총재 시절이었던 1990년에 내각제 반대와 지방자치제 실현을 주장하며 13일간 단식한 적이 있다. 그의 단식은 대통령 직선제와 지방자치제 시행의 기폭제가 됐다.



마지막 저항 수단이 어쩌다



한국당도 올 1월 단식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릴레이 단식’이라는 방식인데 여러 의원들이 나눠서 단식을 진행한 것이다. 말만 들으면 의원들이 며칠씩 나눠서 할 것 같지만, 몇 시간씩 나눠서 하는 방식이었다. 사소한 일(내가 보기에는)로 다섯 시간 30분씩 릴레이 단식을 벌였다는데, 보도에 의하면 건강을 위해 ‘간헐적 단식’을 하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끔 곡기(穀氣)를 끊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게나 고동’이나 모두 따라 하다 보니 울림이 없다. 독재에 대항하는 마지막 저항 수단이었던 단식이 어쩌다 이렇게 조롱거리로 전락했는지 알 수 없다.

두 전직 두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최근에도 정치인들의 단식이 있었다. 지금이 마치 군사독재 정권이라도 되는 듯이 단식을 감행했던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8일 만에 응급실로 실려 갔고, 이후 다른 몇몇 의원들이 동참했다. 그러나 별로 공감을 얻지 못한 것 같다. 명분이 약하기 때문이요 결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절박한 상황에서 ‘진짜 목숨을 걸고 하고 있구나’ 하고 많은 사람이 느낄 수 있어야만 단식도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유치한 따라쟁이로서 ‘효빈 정치’라는 비웃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쟁이는 남의 행동·유행·업적 따위를 따라 하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아닌가.

이들의 잇단 단식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지금은 너무 이를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 두 대통령들의 단식처럼, 정치·사회적 변화를 이끌 만한 사건은 결코 될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서시를 따라 했던 월나라 추녀들처럼, 한낱 웃음거리로 두고두고 회자(膾炙)될지도 모르겠다.



/주 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