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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추억들-송기숙 선생님을 그리며
2021년 12월 16일(목) 06:00
송기숙(1935~2021) 선생님이 그예 돌아가셨다. 고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앓아 오셨기에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날 여기저기서 휴대전화 문자가 들어왔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내 슬픔이 밀려왔다. 진즉 한번 찾아뵐 걸. 졸지에 소식을 듣고 보니 후회막급(後悔莫及)이었다. 그때 그냥 우겨서라도 기어이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몇 달 전. 친구(박병기)한테서 전화가 왔다. ‘병문안 한번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선생님께서 많이 안 좋아지셨다’고 했다. 한데 며칠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사모님께 연락했더니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 나중에 오라’ 하셨다고. 그래 다음을 기약하고 미뤘는데. 아, 이렇게 황망히 떠나시다니.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들은 날. 음복(飮福)을 핑계로 통음(痛飮)했다. 선생님과 ‘교도소 동창’인 박병기와 몇몇 선후배들이 모였다. 모두들 선생님과 인연이 있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선생님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추모를 대신하기로 했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래도 술 몇 순배가 돌자 이야기도 따라 돌기 시작했다. 먼저 이훈(80·이순신 연구가) 선배가 오래된 추억 한 토막을 꺼냈다.

선생님께서 목포교대에 근무하고 계실 때 얘기다. 주위에서들 권유했다. 전남대 국문과 정익섭 교수를 한번 찾아뵙는 것이 어떠냐고. 기왕에 찾아뵈면서 그냥 맨손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양림동 골목 어귀 어느 구멍가게에서 종합선물 세트를 하나 샀다. 한데 이게 탈이 났다. 다음날 정 교수가 선생님을 불렀다. “송 군, 이럴 수가 있는가?”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놓고 간 선물 말일세. 뜯어보니 구더기가 잔뜩 슬었더구만.”



유신독재의 심장을 쏘다

그날 음복하는 자리에서는 ‘5·18광주민중항쟁 사료전집’ 얘기도 나왔다. 나의갑(73·전 5·18기록관장) 선배가 말을 이었다. 당시 “금호그룹 박정구(1937~2002) 회장이 극비리에 3000만 원을 기탁했었다는 사실을 아느냐?”면서. ‘사료전집’은 1987년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으셨던 선생님께서 이처럼 각계의 도움을 받아 발간했다. 강연균(81) 화백은 당시 자신의 작품을 내놓아 책 발간비에 보탰다.

그날 술자리 대화에는 당연히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 빠질 수 없었다. 한때 모두들 강제로 외워야 했던,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名文)으로만 알고 있던 그 국민교육헌장이, 실은 낡은 국가주의 사상으로 점철된 졸문(拙文)이었다는 사실을 난 그때 처음 알았다. 선생님은 1년간 복역한 뒤 석방되었지만 복직이 되지 않은 채 5·18을 맞았다. 그리고 시민군 수습위원으로 활동했다고 해서 내란죄를 뒤집어쓰고 또다시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다.

교육지표 사건이 있었던 1978년, 나는 전남대 국문과 4학년이었다. 그해 6월 선생님이 잡혀가셨다. 먼저 풀려나신 명노근(1933~2000, 당시 영문과 교수) 선생님이 국문과 사무실에 들르셨다. “송 선생이 ‘중정’에 끌려가셨네.” 명 선생님은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쏟으셨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스승은 부모와 같거늘. 선생님이 잡혀가셨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당시 철학과 4학년이었던 친구 박병기(68·전 전남대 철학과 교수)와 함께 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가 집회와 시위에 동참했다. 그리고 캠퍼스 안까지 난입한 경찰에 체포돼 서부경찰서로 연행됐다. 주동자 색출 작업이 밤새워 이뤄졌다. 다음날 나는 풀려났지만 병기는 끝내 나오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교육지표 사건이 있기 몇 달 전. 우리 국문과 학생들은 강원도로 졸업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설악산 어느 여관방에서였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오른 탓이었을까. 갑자기 선생님께서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설(?)하시는 거였다. “지금 비밀리에 전국적으로 모종의 거사를 준비 중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거사가 바로 교육지표 사건이었다.



걸출한 이 시대의 의인

우리는 서울을 거쳐 광주로 돌아왔다. 그때 선생님은 서울에서 잠시 자리를 이탈하셨는데, 아마도 백낙청(84·당시 서울대 해직교수) 선생이나 성래운(1926~1989, 당시 연세대 해직 교수) 선생 등과 접선(?)했을 것이다. 선생님이 ‘수학여행 인솔 교수’로 일부러 나선 것도 사실은 그 ‘비밀 접선’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선생님과 관련된 또 하나의 추억은 월간 ‘예향’에 당신과의 인터뷰를 실었던 일이다. 이제는 누렇게 빛이 바랜 예향 창간호(1984년 10월호)를 서재에서 찾아내 다시 읽어 본다. ‘이달에 만난 사람 -송기숙 교수 어떻게 지냈소’. 인터뷰는 선생님에 대한 인물평으로 시작된다.

“송기숙은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없고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는 것이 없다. … 그의 웃는 얼굴을 볼 때면 나는 가끔 우리나라 가면극의 탈을 연상하곤 한다. … 그런데 놀라운 것은 봉건사회의 억압과 질곡 밑에서도 그처럼 찢어지게 웃는 얼굴을 창조했던 민중의 넉넉하게 이어진 마음의 바탕, 그것을 송기숙 씨가 이 살벌한 경쟁의 시대에도 굳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문인 중에서 쇠전에 넣어 놓고 한참을 못 가려낼 사람을 고른다면 송 선생만 한 이가 다시 있을까. … 그러나 그는 정의로 기준을 삼아 세상을 살아온 어질고 바른 대인이었다.” (소설가 이문구)

인터뷰 기사에는 이런 얘기도 나온다. “교육지표 사건 때는 들어가기 전날 밤에 아내에게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금방 나올 테니 걱정 마라. 아내는 비교적 내 말을 곧이듣는 편이니까 속으로 겁은 났겠지만 각오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금방 나온다’는 남편의 말에 깜빡 속은 사모님께서는 이후 스낵코너에서 국수를 파는 등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붓 하나로 헤쳐 오신 선생님. 선생님은 소설가로서도 많은 문학적 업적을 남기셨다. 하지만 그보다 선생님은 서슬 퍼런 박정희·전두환 독재의 폭압에 굴하지 않았던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선생님을 두고 고은 시인은 “천연기념물 송기숙/ 그가 있어 광주가 참다웠다”(‘만인보’)라고 읊었다. 선생님은 그야말로 ‘걸출한 이 시대의 의인’(박석무 선생의 표현)이었다.

아, 이 시대의 의인이자 대인이셨던 선생님께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더 이상 선생님의 그 온화한 미소를 볼 수 없다니 새삼 비통해진다. 그 구수하고 텁텁한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니 새삼 아픔이 밀려온다. 선생님! 이제 모든 짐 내려놓으시고 편히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