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유지나 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그들만의 세상에서 인간-되기
2019년 11월 12일(화) 04:50
최근 세상의 변화를 촉발하는 영화들이 연이어 개봉되고 있다.

전업주부 엄마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한 여성의 일상을 다룬 소설 ‘82년생 김지영’(조남주)이 각색 영화(2019·김도영)로 확장되면서 흥행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저출산 (초)고령화라는 인구 절벽에 직면한 한국에서 아이 엄마는 고마운 존재일 수 있다. 그런데 남편이 벌어다 주는 생활비에 기대 살아가는 아이 엄마를 ‘맘충’이라 깎아내리면서도 강요하는 ‘현모양처론’은 과거 유산이다. 그녀는 남편만큼 공부도 하고 사회생활도 했던 김지영이 아니던가.

이러한 시대 인식 차이는 결혼식과 장례식을 비롯한 의식에서 성별에 따른 옷차림새로 드러나기도 한다.

여성은 주로 한복을 입지만, 남성은 양복을 입는 의상 코드는 동시대의 비동시대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한복 여성과 양복 남성이 가족이나 동료로 공존하는 것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데 외계인이 이런 풍경을 본다면, “아! 이 지역은 여성이란 존재가 과거 전통을 지켜 나가는 곳이구나!”라고 인식할 여지가 있다.

급격한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이루는 가운데 남녀 동등 학력을 갖춘 80년대 이후 세대에게 성 차이가 성차별로 작동하는 일상은 숙명론으로 수용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김지영이 아픈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울증 여파로 윗세대 여성들에게 빙의된 그녀의 분열증을 보노라니 문득 나혜석이 떠오른다.

한 세기 전, 개화기 조선 여성으로 예외적인 고등교육을 받으며 전방위 예술가로 활동하던 나혜석은 서울 용산시립병원에서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개인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기에 고통스러운 인생길에 들어선 나혜석은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 이전에,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선언했다.

바로 그 외침이 김지영의 아픔과 절규로 반복되는 중이다. 이제 와 다시 보니, 김지영의 우울증을 예고하듯이, 나혜석은 임신과 모성의 고통을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심신의 피곤은 인제 극도에 달하여, 정신은 광증이 발하고, 몸에는 종기가 끊일 새가 없었다”(‘모(母)된 감상기’, 1923)라고. “엄마도 선생님 되고 싶었는데…. 국민학교 때까지 오남매 중에 엄마가 공부 제일 잘했어. 근데 오빠들 공부 시키느라 청계천에서 옷을 만들었지”라며 아픈 딸 김지영 대신 손녀 육아를 맡아 주려고, 바쁘게 해 오던 식당 영업조차 그만두려는 친정 엄마의 회고담은 현재진행형 과거 모습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극장에서 여성 관객의 울음소리가 간혹 들려온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이 글을 쓰면서 ‘2’자로 시작된 주민등록번호, 제2의 신분 ‘여성’으로 살아온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동시에 나 자신의 남은 인생길을 여자답지 않게 창안해 나가야 한다는 소명감이 솟구치기도 한다. 민주화 과정 속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급선무로 요구되는 개선안에도 불구하고 ‘남자답게, 여자답게’란 숙명론이 시대착오적 정신병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개인 김지영의 인생길은 힘들어도 반드시 개척해 나가야 할 인생 여정이다.

10월 말 개봉한 ‘우먼 인 할리우드’(This Changes Everything, 2018)는 188편의 할리우드 영화와 미디어산업에서 일해 온 96명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엮어 낸 다큐이다.

성차별적 고용 불평등 증언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1991) 이후 백마 탄 왕자 없는 독립여성 이미지 구축에 나선 지나 데이비스가 꾸린 연구소의 조사에 따른 방대한 데이터의 힘을 보여 준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미국 제작 콘텐츠가 글로벌미디어 80%를 지배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를테면, 할리우드가 영화산업 초기보다 수익성이 높아지면서 더욱 남성 위주로 꾸려졌다는 사실도 통계치를 통해 입증된다. 결정권은 자본 권력인 남성이 갖고 있기에 능력 있는 여성 감독들의 진출과 저항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감독은 연기지도 해 줄 테니 무릎에 앉아 보라고 하더군요. 톰 행크스도 무릎에 앉히나요?”라는 샤론 스톤의 경험담은 악습에 불과한 업계의 진실을 실명으로 고발한 연기자들의 용기를 증명해 준다. 할리우드에서 촉발된 미투 운동이 세계 각 분야로 펴져 나가는 변화하는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가 우리 현실에도 접속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