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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일춘추-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언어의 힘
2019년 11월 08일(금) 04:50
주문한 시집이 도착했다. 시인을 알지만, 잘 모른다. 그와 알고 지낸 시간이나 함께 나눈 대화는 내 삶의 다른 시간에 비하면 턱없이 짧다. 하지만 이제 함께 보낸 시간의 길이가 앎의 정도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다. 내가 아는 시인은 퉁명스럽지만 따뜻하고, 거칠지만 정교하다. 그는 막연한 낙관이나 섣부른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며,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의 힘은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온다. 그것은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관조와는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담그는 방식이다.

시인은 당연하게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으로 그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견디는 데서 시를 쓴다. 그의 시는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단순한 묘사나 고발에 그치지 않는다. 정확한 현실 인식 너머를 생각한다. 개인과 사회, 개인과 공동체, 개인과 구조 등의 관계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비결을 제공한다. 그것은 어쩌면 어릴 적 고향의 강가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던 강물에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을 것이다. “어린 내가 서러우면 강둑에 앉아 흐르는 물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황규관, ‘강물’ 중에서)

흘러가는 강물은 시작과 끝에 주목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주목하고, 반응하고, 살아간다. 그것은 조바심이 아니라 기다림을 배우는 일이다. 멀리서 정류장으로 차가 들어오면 먼저 타려고 뛰어간다. 차를 놓치면 안 된다는 아우성이 넘치는 시대에 이번 차를, 다음 차를, 다음다음 차를 그냥 보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배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번 차는 모른 척 보내고/ 우두커니 혼자가 되자/ 혼자가 되어/ 멀리서 내리는 빗소리를 듣자// 다음 차도 보내고/ 다음다음 차도 보내고/ 저물녘에 우는 늙은 새 울음도 보내고/ 슬픔에 사로잡힌 영혼도 보내고……”(‘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중에서)

시인의 힘은 그의 언어에서 나온다. 그는 부드럽고 유려한 문체가 아니라 적확하고 명료한 언어의 힘을 지향한다. 그의 언어는 어떤 사상이나 개념이나 집단에 정박하지 않고 흘러갈 따름이다. 언어가 힘을 잃어버린 시대에 그의 언어에서 그 힘을 발견한다. 균형을 잡고 판단을 가늠하는 기준을 세워 주었던 ‘법의 언어’가 사라졌고, 현실과 사실을 가장 정확하고 날카롭게 전달했던 언론의 언어가 실종되었다. 아이들의 언어는 가장 빠르게 오염되고 있으며, 어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카톡 단톡방에서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죽이는 언어들이 난무한다.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살리는 언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언어가 사라지고 죽어가는 시대에 우리의 언어는 어떠해야 하고 어떤 언어를 지향해야 하는 걸까.

“가장 큰 언어는 들을 수 없는 언어다./ …가장 깊은 언어는 그 기원을/ 모른다… / 가장 오래된 언어는 그 최종 지점도/ 없다…//오늘의 언어가/ 과거의 언어가 아니듯/ 우리의 언어가 어제의 비명이었고/ 싸움이었고 사랑이었듯/ 반달을 바라보는 골목길이었듯/…/ 국가의 언어 말고/ 탐욕의 언어 말고/ 나의 언어를 나의 너/ 의 언어를// 원통하게 죽어간 이의 언어를/ 언제나 버려졌던 어머니의 언어를/ 어깨가 떨리는 언어를/ 바람결에 반짝이는 언어를……”(‘가장 큰 언어’ 중에서)

이 시대에 여전히 ‘언어’를 붙들고 있는 이들을 주목하자. 시인, 소설가, 비평가, 에세이스트 등 다양한 형태의 작가들은 어쩌면 지구를 지키는 생태운동가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이라도 언어를 붙들고 씨름하자. 그것은 나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고, 우리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며, 직장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고, 공공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다.

가을이 깊어 간다. 겨울의 문턱이다. 시집 한 권 읽자, 시집 한 권 사자. 나의 언어, 우리의 언어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