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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결혼이야기’와 기획영화
신파 ‘NO’ 재미 ‘OK’… 관객 맞춤 영화 전성기
관객층 취향·기호 분석 제작 ‘결혼이야기’ ‘미스터 맘마’등 흥행
‘투캅스’ 강우석 감독 등 약진…대기업 본격 투자 한국영화 산업화
2019년 11월 06일(수) 04:50
할리우드의 직배사들은 1988년 8월 UIP사의 ‘위험한 정사’를 시작으로 국내 배급을 시작했다. 이후 직배 영화들은 급속히 국내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영세 자본과 전 근대적인 배급구조로 특징 지워지는 한국영화산업은 존립기반이 뿌리 채 흔들렸다.

이에 영화인들은 미국영화직배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로 맞섰다. 그러나 투쟁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일부 관객들의 입에서는 한국영화의 수준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영화인들은 한국영화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고뇌했다. 그리고 관객들이 선뜻 돈 내고 볼 만한 경쟁력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선두에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젊고 합리적인 영화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한참 팽창 일로에 있었던 비디오 시장이 극장 흥행 외에도 부가 수익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착안해, 비디오 판권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 내며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결혼이야기’(1992·김의석)는 그 신호탄이었다. 제작사 신씨네는 주먹구구식의 한국영화 제작관행에서 탈피해 특정 관객층의 취향이나 기호를 분석해 영화제작 사전 단계에서 이를 반영한 ‘관객용 맞춤 영화’를 내놓았다. 이름하여 ‘기획영화’가 도착한 순간이었다. ‘결혼이야기’는 기획 단계에서 신혼부부 200쌍을 면접해 수집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했고, 회의를 거쳐서 시나리오를 수정, 보완 했다.

‘결혼이야기’는 1992년 서울 관객 수 52만 명이라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기록과 함께 그해 흥행 1위에 올랐다. 이 영화의 화려한 등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역사적인 것이었다.

이전의 한국영화에서 주로 다루었던 신파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가족의 등장을 최소화한 채 주인공 남녀 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섹스장면의 연출에 있어서도 관음증을 자극하는 코드에서 벗어나 젊고 발랄한 섹시함으로 접근했다. 여기에다 경쾌한 이야기 전개와 밝은 톤의 영상은 관객들이 한국 대중영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결혼이야기’는 한마디로 한국 영화산업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영화였다.

강우석 감독


‘결혼이야기’가 성공하자 신씨네는 곧바로 ‘미스터 맘마’(1992·강우석)를 만들어 기세를 이어갔다. 부인 대신 아이를 돌보게 된 직장남성의 좌충우돌 이야기에 관객들은 지지를 보냈다. 아이를 돌보는 직장남성의 이야기는 이전의 한국영화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소재였다. 그러나 영화로 만들어졌고 흥행에 성공했다. 확실히 한국사회는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었다. 그렇다. 1992년은 한국대중문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해였다. 1992년 5월 서태지와 아이들은 ‘난 알아요’를 내놓으며 댄스음악의 시대를 열었고, MBC미니시리즈 ‘질투’는 트렌디 드라마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한국영화는 ‘결혼이야기’에 이어 ‘미스터 맘마’까지 성공하며 기획영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시기에 등장한 신세대는 심각하거나 진지한 것을 거부하고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며 새로운 대중문화의 시대를 주도했다.

‘미스터 맘마’까지 흥행에 성공하자 한국영화는 젊은 감각의 기획자와 프로듀서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새로운 영화사의 설립과 투자와 제작이 분리된 프로듀서 시스템이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기획영화의 등장 이후 지속적으로 등장한 영화 전문 인력은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국내 영화산업에 큰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렇듯 한국영화는 젊은 기획자들의 손을 거친 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며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시기 단연 두각을 나타낸 영화인은 강우석이다. 강우석은 ‘미스터 맘마’의 흥행을 발판삼아 강우석 프로덕션을 만들고 ‘투캅스’를 만들게 된다. ‘투캅스’는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완화된 검열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감히 경찰을 풍자하거나 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완화된 검열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허락했고, 완성된 영화는 경찰의 비리를 통쾌하게 풍자하면서 극장 안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렇게 ‘투캅스’는 서울 단관 극장 개봉 관객만 무려 87만 여명이 화답했다. ‘투캅스’는 한국영화도 재미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한국영화가 외국영화에 비해 오락적인 측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세를 몰아 강우석감독은 권태기가 찾아온 남편이 마누라를 청부살해하려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낸 ‘마누라 죽이기’(1994)를 내놓게 된다. 박중훈과 최진실의 티격태격하는 설정과 살인청부업자(최종원)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웃음이 상당한 영화였다. 이 영화 역시 크게 성공했다. 그렇게 강우석감독은 영화사 시네마서비스를 창립했고, 이후 충무로에는 본격적인 강우석시대가 열리게 된다. 강우석은 세기말과 세기초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의 영화인이었다.

이 시기 한국영화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신철이다. 그는 ‘기획영화’인 ‘결혼이야기’의 중심에 있었고, ‘구미호’(1994·박헌수)와 ‘은행나무 침대’(1996·강제규)등을 통해서는 한국영화 최초로 컴퓨터그래픽(CG)을 시도하며 한국영화의 표현 영역을 확대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199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는 할리우드 외화 직배로 위기를 맞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 내며 문화계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 중심에 기획영화가 있었고, 기획영화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영화도 볼 만하다는 생각을 관객들에게 심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한국영화를 외면했던 관객들이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획영화들이 거둔 성공을 계기로, 그 동안 영화산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던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뛰어들게 되면서 한국영화 산업은 질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1998·강제규)가 탄생할 수 있었다.





/조 대 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