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스승’ 이들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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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민이라면 무등산 자락에 있는 춘설헌을 한 번쯤 가 보았을 것이다. 이곳의 주인은 세 번 바뀌었는데 모두 이 시대의 선각자들이었다. 첫 번째 주인은 석아(石啞) 최원순(1896~1936), 두 번째 주인은 오방(五放) 최흥종(1880~1966), 그리고 마지막 주인이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이었다. 택호(宅號) 또한 석아정(石啞亭)에서 오방정(五放亭)으로 다시 춘설헌(春雪軒)으로 바뀌었다. 이들 세 분의 선각자들을 기리는 전시회가 ‘무등 시대의 스승을 품다’라는 제목으로 요즘 의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과 유품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오늘 우리는 이들의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오방 선생은 나병 환자와 걸인들을 돌보는 데 일생을 헌신해 ‘광주의 성자(聖者)’로 불렸다. 선생의 호(號) 오방(五放)은 다섯 가지 속된 욕심인 식욕, 색욕, 물질욕, 명예욕, 생명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다. 색욕을 버리기 위해 거세(去勢)까지 감행했던 선생은 광주 최초 청년 야학교와 유치원을 개설한 근대화의 선구자로 광주YMCA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고 3·1운동을 주도했다.
의재 선생은 1930년대에 연진회를 조직하고 해방 이후에는 1970년대까지 농업학교를 운영하면서 가난한 청년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던 교육가이자 사상가였다. 조선 후기 한국 남종화를 완성했던 허련의 후손으로, 시·서·화를 겸비했으며 생전에 광주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추앙받았던, 더 이상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남종화의 대가다. 오방과 의재는 해방 직후 농업학교에서 각각 교장과 부교장을 맡은 일도 있다.
광주 최초의 여의사
이들 두 분이 비교적 널리 알려진 데 비해 2·8독립운동의 주역인 석아 최원순은 일반인들에게 조금은 생소한 편이다. 오늘 이 분들의 삶을 돌아보며 석아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광주 최초의 여의사였던 석아의 부인 현덕신(1896~1963)도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이 새롭다.
아주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있다. 사진 속의 여인은 가늘고 둥근 테의 안경을 쓰고 있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긴 단발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평생 단발머리를 하고 다녔다는 말이 생각난다. 의사였던 그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새벽 한 청년이 찾아와 “급한 산모가 있다”며 왕진을 청했다. 그녀는 잠결에 왕진 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서려다 잠시 돌아앉았다. 엉클어진 긴 머리를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매만지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몇 분가량 지체한 사이, 그녀가 환자의 집에 당도했을 때 임신부는 이미 목숨이 꺼진 뒤였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그녀는 평생 단발머리 모습으로 생활하게 된다.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현덕신은 이화학당을 나와 잠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17년 ‘불쌍한 동포에게 회생약을 먹여 신천지의 신복락을 맛보고 누리게 하리라는 건장한 뜻을 품고 현해탄을 담대히 건너’ 일본 유학을 떠난다. 그녀가 적성에도 맞지 않았던 의사의 길을 택한 것은 순전히 ‘조선 여자’들과 ‘조선 사회’를 위해서였다. 이윽고 1921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마치고 그녀는 춘원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1917년 졸업)과 정자영(1920년 졸업)에 이어 조선의 세 번째 여의사가 되었다. 그녀는 1919년 1월, 유학생들에 의해 모종의 거사(2·8 독립선언)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혼자서 마련한 자금 40원을 내놓기도 한, 일본 경시청의 1급 요시찰 인물이었다.
그녀는 1923년 6월, 유학시절 인연을 맺은 광주 출신 동아일보 기자 최원순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제 그녀의 남편 석아 최원순의 삶을 돌아볼 차례다. 그동안 선생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너무 얄팍했다. 그러나 이 지역 숨은 작가들을 발굴 소개하며 학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조선대 이동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근대 광주정신의 출발은 최원순에서부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교수의 안내에 따라 일제 치하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그의 삶과 행적을 따라가 보자. 1896년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닌 뒤 2년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정경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 독립선언’의 불씨를 놓았다. 최원순은 거사 준비를 위한 동서연합웅변대회에서 미국 교포들이 30만 원이라는 거액의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소식과 함께 유학생들의 자세와 나아갈 길을 역설했다. 그러나 최원순은 조직 규합 등 사후 일을 도맡는 것으로 결정돼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자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다. (이는 소설가 이무영이 1958년 ‘자유문학’에 발표한 ‘2·8 전후’라는 소설에도 묘사돼 있다.)
최원준은 이광수가 쓴 독립선언서 1만 장을 비밀리에 등사하였다. 독립선언서는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600여 명의 유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낭독되었다. 적국의 심장부에서 조선 독립의 함성이 울리던 그날, 유학생 40여 명이 일경에 체포 연행 구금되었다.
오방·석아·의재의 우정
최원순은 시대를 깨우고 조선 민중을 깨운 대중연설가였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년 동안 조선 땅 전국을 순회하면서 대중강연을 펼쳤는데 ‘칼날을 들고 청중의 심장을 찌르는 듯하고 혀에서는 불비가 쏟아지는 듯한’ 열변으로 대중을 움직였다 한다. 최원순은 달변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도 잘 썼다고 한다.
당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기도 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는 동아일보에 게재한 글 ‘이춘원에게 묻노라’를 통해 ‘조선인을 무지몽매한 야만 인종으로 규정한 이유와 근거 그리고 열악하다는 조선 민족성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론적인 근거를 요구하였다.
춘원을 공박하는 글로 존재감을 알린 그는 1923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한다. 그는 일제의 언론 탄압을 받으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몇 차례 필화(筆禍)를 입기도 했다. 1926년 8월22일 자 ‘횡설수설’에서 ‘총독 정치는 악당 정치’라고 비판했다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석 달간 옥살이를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권력 앞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던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까지 지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광주로 내려온 뒤 무등산 자락에 석아정(石啞亭)을 짓고 요양하였다.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돌 벙어리’가 되겠다고 작심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병을 치유하지 못한 채 우리 나이로 41세 되던 해 요절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시대의 스승’ 세 분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돌아보았다. 오방은 의재·석아보다 열 몇 살이나 더 많았지만 당시 형제와 같은 두터운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들 자랑스러운 이 지역 근대 선각자들의 우정은 지금 오방의 손자 최협(전남대 명예교수), 석아의 손자 최영훈(서양화가), 의재의 손자 허달재(한국화가) 등 3대로 이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주필
광주 최초의 여의사
이들 두 분이 비교적 널리 알려진 데 비해 2·8독립운동의 주역인 석아 최원순은 일반인들에게 조금은 생소한 편이다. 오늘 이 분들의 삶을 돌아보며 석아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광주 최초의 여의사였던 석아의 부인 현덕신(1896~1963)도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이 새롭다.
아주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있다. 사진 속의 여인은 가늘고 둥근 테의 안경을 쓰고 있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긴 단발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평생 단발머리를 하고 다녔다는 말이 생각난다. 의사였던 그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새벽 한 청년이 찾아와 “급한 산모가 있다”며 왕진을 청했다. 그녀는 잠결에 왕진 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서려다 잠시 돌아앉았다. 엉클어진 긴 머리를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매만지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몇 분가량 지체한 사이, 그녀가 환자의 집에 당도했을 때 임신부는 이미 목숨이 꺼진 뒤였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그녀는 평생 단발머리 모습으로 생활하게 된다.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현덕신은 이화학당을 나와 잠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17년 ‘불쌍한 동포에게 회생약을 먹여 신천지의 신복락을 맛보고 누리게 하리라는 건장한 뜻을 품고 현해탄을 담대히 건너’ 일본 유학을 떠난다. 그녀가 적성에도 맞지 않았던 의사의 길을 택한 것은 순전히 ‘조선 여자’들과 ‘조선 사회’를 위해서였다. 이윽고 1921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마치고 그녀는 춘원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1917년 졸업)과 정자영(1920년 졸업)에 이어 조선의 세 번째 여의사가 되었다. 그녀는 1919년 1월, 유학생들에 의해 모종의 거사(2·8 독립선언)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혼자서 마련한 자금 40원을 내놓기도 한, 일본 경시청의 1급 요시찰 인물이었다.
그녀는 1923년 6월, 유학시절 인연을 맺은 광주 출신 동아일보 기자 최원순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제 그녀의 남편 석아 최원순의 삶을 돌아볼 차례다. 그동안 선생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너무 얄팍했다. 그러나 이 지역 숨은 작가들을 발굴 소개하며 학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조선대 이동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근대 광주정신의 출발은 최원순에서부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교수의 안내에 따라 일제 치하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그의 삶과 행적을 따라가 보자. 1896년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닌 뒤 2년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정경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 독립선언’의 불씨를 놓았다. 최원순은 거사 준비를 위한 동서연합웅변대회에서 미국 교포들이 30만 원이라는 거액의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소식과 함께 유학생들의 자세와 나아갈 길을 역설했다. 그러나 최원순은 조직 규합 등 사후 일을 도맡는 것으로 결정돼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자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다. (이는 소설가 이무영이 1958년 ‘자유문학’에 발표한 ‘2·8 전후’라는 소설에도 묘사돼 있다.)
최원준은 이광수가 쓴 독립선언서 1만 장을 비밀리에 등사하였다. 독립선언서는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600여 명의 유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낭독되었다. 적국의 심장부에서 조선 독립의 함성이 울리던 그날, 유학생 40여 명이 일경에 체포 연행 구금되었다.
오방·석아·의재의 우정
최원순은 시대를 깨우고 조선 민중을 깨운 대중연설가였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년 동안 조선 땅 전국을 순회하면서 대중강연을 펼쳤는데 ‘칼날을 들고 청중의 심장을 찌르는 듯하고 혀에서는 불비가 쏟아지는 듯한’ 열변으로 대중을 움직였다 한다. 최원순은 달변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도 잘 썼다고 한다.
당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기도 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는 동아일보에 게재한 글 ‘이춘원에게 묻노라’를 통해 ‘조선인을 무지몽매한 야만 인종으로 규정한 이유와 근거 그리고 열악하다는 조선 민족성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론적인 근거를 요구하였다.
춘원을 공박하는 글로 존재감을 알린 그는 1923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한다. 그는 일제의 언론 탄압을 받으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몇 차례 필화(筆禍)를 입기도 했다. 1926년 8월22일 자 ‘횡설수설’에서 ‘총독 정치는 악당 정치’라고 비판했다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석 달간 옥살이를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권력 앞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던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까지 지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광주로 내려온 뒤 무등산 자락에 석아정(石啞亭)을 짓고 요양하였다.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돌 벙어리’가 되겠다고 작심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병을 치유하지 못한 채 우리 나이로 41세 되던 해 요절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시대의 스승’ 세 분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돌아보았다. 오방은 의재·석아보다 열 몇 살이나 더 많았지만 당시 형제와 같은 두터운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들 자랑스러운 이 지역 근대 선각자들의 우정은 지금 오방의 손자 최협(전남대 명예교수), 석아의 손자 최영훈(서양화가), 의재의 손자 허달재(한국화가) 등 3대로 이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