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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한센 인권의 날 제정을 제안하며
2019년 06월 25일(화) 04:50
그날 아침 여덟 시, 입원 환자들의 절반에 해당하는 3000명이 보는 앞에서, 경북 성주가 고향인 스물일곱 살의 환자 이춘상은 수오 원장에게 “너는 환자들에게 무리한 짓을 했으니 내 칼을 받아라”라고 외쳤다. 그는 거사 후에 체포되어 소록도의 감금실에 감금되었고, 얼마 후에 공회당에 차려진 임시 법정에서 자신의 거사가 일시 귀성 허가의 불공평, 일상 작업의 가혹성, 감금실 운영의 자의성, 강제 헌금, 일본인 간호장의 횡포와 비인간적 대우, 식량 배급에서의 부정 등을 폭로하여 원생들의 처우 개선과 병원 개혁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대구 복심법원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피력했지만, 결국 이듬해 2월1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춘상에게 죽임을 당한 수오 원장은 칙임관으로 도지사급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였다. 이춘상 사건은 일제 35년 동안 조선 내에서 일어난 조선인의 저항 중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권 운동이자 민족 운동이었다.

사실 이춘상 사건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와 소록도갱생원의 강권적인 통제 정책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들의 저항은 이춘상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1년 5월 20일 소록도갱생원 창립 25주년 기념식에서 원장 동상 건립을 위한 노동과 헌금을 제안한 공로로 박순주라는 원로 환자가 표창을 받았는데, 이는 다른 환자들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다. 기념식이 끝난 열흘 후에 이길용이라는 환자가 박순주를 찾아가 그의 잘못을 꾸짖고, 그를 살해했다. 이길용은 자신의 거사가 6000여 환우의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록도갱생원의 강권적 통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문제의 동상은 당시 가난한 환자들이 갱생원에서 한 달 내지 석 달 정도 일을 해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을 강제로 헌납받아 만든 것이었다. 이 동상은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무기 제조를 위해 헐릴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운명을 지닌 것이었다.

이춘상 사건 직후에 일본 한센병 정책의 핵심 인물이자 국립 애생원 원장이었던 미츠다 겐스케는 큰 충격을 받고, 그를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에 비유했다. 미츠다 원장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새롭게 점령한 동남아시아 각지에 나환자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일본식 나 요양소를 세울 것을 계획했고, 여기에 필요한 인력을 소록도갱생원의 환자들로 충당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오 원장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동반자였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한국 한센 100년의 역사를 다시 생각한다면, 그것은 총독부 당국이나 병원 중심이 아니라 환자들의 인권 회복과 증진의 역사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인권 회복 운동은 이미 그동안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강제 수용에 대한 보상을 이끌어 냈고, 해방 후에 이루어진 강제 단종과 불임 조치에 대하여 소송을 통한 배상도 이끌어 냈다. 각종 사회적 차별에 대한 치유를 위하여 한센특별법도 제정되었다. 그러나 정작 과거에 이루어진 인권을 위한 환자들의 투쟁은 아직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만든 소록도병원 개원 기념일이 아직도 지켜지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이춘상 선생을 기억하는 공식적 기념일이 아직도 없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과거의 어두운 낙인과 오명을 지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만시지탄이지만, 이춘상 선생을 기억하는 한센 인권의 날을 제정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