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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변호사] 반민 특위 논란에 부쳐
2019년 04월 29일(월) 00:00
지난 2016년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 큰아들과 함께 독일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베를린에서 시작해서 포츠담,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뮌헨을 거쳐 살짝 오스트리아 로이테로 넘어 갔다가 다시 보덴제, 슈바르츠발트, 하이델베르크를 지나 프랑크푸르트에서 귀국하는 8일 일정이었다.

연방 국회와 베를린 장벽 등지의 정치 관광, 뮌헨의 BMW 본사 등 산업 관광, 하이델베르크 고성과 슈방가우 백조의 성 등 유람 관광으로도 손색이 없었지만, 제일 핵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역사 관광이었다고 답하고 싶다. 바로 베를린 노른자위 땅을 채운 홀로코스트 기념관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소에는 나치 부역자들 사진과 행적이 빼곡히 적혀 전시되어 있고, 당시 기소, 변호, 판결 내용 및 언론 보도도 게시되어 있다.

1945년 11월 20일∼1946년 10월 1일까지 심리가 실제 열렸던 2층 600호는 필자 같은 관광객에게 그대로 공개되는 역사적 장소가 되었다. 600호 법정 피고인석에 착석한 전범 피고인들을 촬영한 대형 사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독일은 나치 치하에서 권력을 휘두른 부역자들(正)에 대해 사법 절차에 따른 적확한 처벌(反)을 이루었기에, 집단 학살을 반성하는 홀로코스트 기념관(合)을 그렇게 웅장하게 건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끄러운 집단 학살의 역사를 가졌더라도 반정(反正)으로써 정확한 적폐 청산을 이룩했으므로, 과거의 부끄러움을 그 부끄러움 그대로 오히려 더 뻔뻔하고 웅장하게 기념할 수 있겠구나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제헌 헌법 101조는 ‘광복 이전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고,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한민국 법률 제3호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제정하였다.

제1호 정부 조직법(광복 이후 정부 조직), 제2호 사면법(당시 수감된 독립운동지사 석방)에 이어 제3호로 반민법을 제정한 순서를 보면, 당시 시민의 반민족 행위자 처벌에 관한 절박함과 법률 제정 권자의 뚜렷한 입법 의지를 알 수 있다. 반민법 공포에 따라 국회는 1948년 10월 12일 반민 특위 구성을 마친 다음, 특별재판부 재판관, 검사관, 조사부를 꾸려 민족 반역자 처단 기구를 완성하였다.

어디나 반동 세력의 반격은 있게 마련이라. 노덕술, 최난수 등은 1948년 10월 말경 대법원장(김병로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 검찰총장(반민특위 특별검찰부장), 국회의장(신익희) 등의 암살 계획을 짰으나, 모의자의 자수로 실패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 특위가 3권 분립에 위배된다는 법 이론, 안보에 위협에 된다는 현실론으로 반민 특위를 무력화하는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였으나 부결되었다. 1949년 1월 친일 기업인 박흥식의 체포로 활동을 시작한 반민 특위는 같은 해 5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힘을 잃더니, 그해 6월 6일 특위 산하 특경대 습격 사건으로 완전히 복구 불능이 되었다. 이른바 6·6 사태 두 달여 만인 1949년 8월 31일 반민 특위는 그렇게 해체되고 말았다.

반민 특위의 해체는 반민족 부역자의 재림을 뜻하고, 이는 역사에서 부정(不正)이 다시 부정(否定)되어 정(正)이 되는 경험의 실패를 뜻한다.

독립운동과 친일, 광복, 반민 특위 구성, 부역 세력의 반격, 반민 특위의 실패의 사정이 이와 같거늘, 최근 모 중진 정치인이 ‘우리 해방 후에 반민 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라고 했다. 그가 ‘반민 특위’와 ‘민족 반역자, 부일 협력자, 전범, 간상배’ 사이 과거 세력 다툼을 가치 중립적 국론 분열로만 인식한다면 그의 역사 인식이 참으로 졸렬하다.

그가 나는 ‘반민 특위’보다 ‘민족 반역자, 부일 협력자, 전범, 간상배’ 편에서 정치하겠다는 내심을 ‘반문 특위’로 변명한 것이라면 그는 참으로 비겁하다. 통합과 비전을 말해야 할 정치인이 졸렬 아니면 비겁 혹은 양자의 어중간한 곳에 서 있다면 그의 미래는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