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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호 영암 신북성당 주임신부] 소유할 것인가? 아니면 존재할 것인가?
2019년 02월 08일(금) 00:00
면도기를 구입하려 한 대형 마트에 갔다. 나는 자연스럽게 카트를 밀고 매장에 들어섰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몸은 이미 좋아하는 생활용품 진열대를 서성이고 있었다. 좋아하는 물건들을 보며 정신이 쏙 빠져버린 나는 생활용품 판매대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면도기만 사면 되는데’하며 정신을 차리고 면도기와 몇몇 물건들을 고른 후 계산대를 향했다.

그런데 계산대에 지나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문득 나는 ‘저 물건들이 지금 필요한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계산 후 집으로 돌아와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내 자신이 한심했다. 왜냐하면 전에 샀던 똑같은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물건들은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았지만, 왠지 그것을 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물건을 샀을 때, 그 순간에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그 순간 내 마음은 든든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그 물건을 구입하지 않았다면 내 마음은 어땠을까? 나는 소유하지 못한 아쉬움에 공허함만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산업 사회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면서 풍요로움을 경험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값진 노동을 통해 재화를 얻고, 그 재화는 소비라는 이름으로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누리게 한다. 그러나 제어할 수 없는 탐욕이 증가됨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무분별한 소비, 많은 것을 소유하고 독점하는 것만이 자신을 존재하게 한다고 망각한다. 무분별한 소비를 통한 소유는 자신도 모르게 천박한 자본주의에 우리 자신을 가두어 버린다. 우리가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라는 말을 빈번히 쓰는 것을 보면, 얼마나 소유하려는 욕구가 큰지를 알 수 있다. 살기 위해 소유하는 것인데, 지금의 우리 사회는 소유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정신분석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현실을 이미 예견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현대 사회를 이렇게 논한다.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며, 그것도 아마 오늘날의 풍요한 산업 사회의 가장 중요한 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다의적(多義的)인 특질을 갖고 있다. 즉 그것은 우선 불안을 제거해준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가 곧 그 욕구충족적 성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내가 가지고 있는 것 및 내가 소비하는 것으로.’”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 생존의 두 가지 양식을 소개한다. 그 두 가지 양식은 ‘소유’와 ‘존재’양식이다. ‘소유 양식’은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양식이다. 그리고 ‘존재 양식’은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기쁨을 확신하는 양식이다. 다시 말해 ‘소유 양식’은 물질 중심으로 죽은 관계로 보았는데, 이 양식의 결과는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의 차별과 외주화의 산업 재해이다. 그리고 ‘존재 양식’은 생명의 철학이고 삶의 긍정적 부분이라며,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예로 든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4-25), “인간 발달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소유를 갈망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끝없는 욕망을 부추기며 인간관계를 죽음의 관계로 내몰고 있는 ‘소유’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신을 희생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생명의 관계인 ‘존재’의 삶을 것인가?’의 사이에서 선택을 고심해야 한다. 인간을 추악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소유 양식’이다. 하지만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살아가게 하는 것은 ‘존재 양식’이다. 그러므로 어떤 삶에 대한 선택권과 그 선택의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