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이덕일의 ‘역사의 창’]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은
2019년 01월 31일(목) 00:00
1995년 8월 15일 당시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다. 당시 이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 건물 일부라도 일제의 학살 만행이 발생했던 수원 제암리 같은 곳으로 옮겨 ‘일제 만행 전시관’ 같은 것을 만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 사회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을 겪었다.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으며 나아가 현재 한국이 이만큼 성장한 원동력도 일제강점기 덕분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희한한 주장은 그들의 관점을 보면 바로 이해된다.

일제강점기 때 개벽사에서 발행하던 ‘별건곤’ 1932년 11월호는 당시 조선 제일의 갑부들로 민영휘, 이항구, 고희경 등을 꼽고 있다. 원명이 민영준인 민영휘는 매천 황현이 ‘오하기문’을 통해 왕비 민씨의 친척 가운데 세 도적 중 한 명으로 꼽은 사람이다. 게다가 나라 팔아먹은 공로로 총독부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받은, 친일 매국적(賣國賊)이다. 이완용의 둘째 아들 이항구도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부친과 함께 일제에 공을 세운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의 한 명으로 수록된, 대를 이은 친일 매국적이다. 고희경은 1907년 이완용, 송병준 등과 함께 정미7적(七賊)으로 규탄받고 매국의 대가로 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고영희의 아들이다. 고희경은 이후 백작으로 승급된다.

이런 소수의 친일 매국노들이 잘 먹고 잘살았던 시대가 일제강점기이고, 이들의 눈으로 이 시대를 보니 나온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그래서 역사의 관점이 중요한 것이다. 친일 매국노(賣國奴)들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사형당하고, 감옥에서 옥사하고, 신음하던 일제강점기가 태평성대로 보이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1948년 건국절 주장이다. 1919년 3·1혁명 직후인 4월 11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이 아니라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건국했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세계 민족 해방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독립 전쟁은 반란으로 전락한다. 동시에 해방 공간에서 미군정에 의해 다시 되살아난 친일 매국 세력들이 건국 공로자로 둔갑하니 건국훈장을 수여해야 한다. 그래서 현 정권의 주요 인사들 대부분이 ‘1948년 건국설’을 반대하고 ‘1919년 건국설’을 지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작년 7월 17일 제헌절 때 ‘제헌 70년’ 운운하는 깃발이 휘날렸는데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이 나라에 헌법이 처음 생겼다는 논리다. 그럼 그간 대한민국은 헌법도 없던 나라였나?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무엇인가? 이 헌장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고,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이다’이며, 제4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信敎),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信書),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이라는 것이다. 현행 헌법에 비추어 전혀 손색이 없다.

대한민국은 1919년 건국되었지만 헌법은 1948년에 제정되었다는 상호 모순이 그대로 통용되는 나라. 그러다 보니 식민지 근대화론은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전국 각지에 일제식 건물 몇 채만 남아 있으면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지 못해서 안간힘을 쓰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근현대사는 진보적 관점으로 본다면서도 한국 고대사는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보고, 조선 후기사는 이완용이 마지막 당수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의 관점으로 보는 이상한 현상이 통용되는 것이다.

이 나라 각지에는 치열한 독립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다. 전국 각지의 일제식 건물들을 독립전쟁관으로 재단장한다면 모를까, 허물어져 가는 일제식 건물 몇 채가 무슨 근대 문화 역사인가? 매년 수십만 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찾았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김영삼 정부는 외화벌이에 역행한 것인가? 하나의 잣대로 사물을 보는 역사관이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