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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만세현장을 가다] <2> 장성·담양
장성 1500여명 6차례 ‘만세운동’ 사망 19명·부상 15명
2019년 01월 29일(화) 00:00
100년 전 장성에서 가장 격렬하게 3·1운동을 펼쳤던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 건립된 삼일사(三日祠). 류상설·고용석·정병모 등 주민 12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된 장성군 장성읍 장성공원 내 3·1운동열사장성의적비.








광주에서 불꽃이 일어난 만세시위는 담양·장성 등 주변지역으로 번지며 전남지역 전체를 뜨겁게 타올랐다. 장성과 담양의 만세시위 현장을 찾았다.



◇장성=지난 26일 방문한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삼일사(三日祠)는 적막한 마을 분위기와 함께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찾는 사람도,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 빗장은 굳게 잠겨 있었고 오랜 시간 보수를 하지 않은 듯 목재 건물은 단청이 벗겨지고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삼일사는 장성의 가장 격렬했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북이면 모현리에서 3·1운동 거사를 일으켰던 류상설 등 12명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989년 창건됐다. 모현리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나며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기는 온데간데 없고 조용히 공적비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성군사(長城郡史·2001년 발간)에 따르면 장성에서는 서울 3·1운동 이전부터 이미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있었다.

장성에서의 만세 시위는 삼서면 소룡리, 장성읍, 모현리 등 크게 세곳으로 나뉜다.

가장 먼저 일어난 삼서면 소룡리의 만세운동은 송주일에 의해서 주도됐다. 그는 1919년 3월 8일 광주시 양림동에 사는 송흥진으로부터 장성에서의 만세시위를 촉구하는 서신을 받았다. 송주일은 3월 10일 광주 만세운동에 맞춰 마을의 예수교 예배당에서 교인 70여명에게 그 서신을 읽어줬다.

편지의 내용은 ‘조선은 이제 독립하게 됐으니 면사무소와 동내 이장은 물론 마을 사람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독립만세를 외칩시다’였다.

교인들은 이날과 3월17일 두차례 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국 송주일은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같은 시기 장성읍에서도 기독교인들에 의해 만세시위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 이들은 3월15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일본 헌병대의 삼엄한 경계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이때 장성지역 유지였던 정선유가 나선다. 그는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와 평양의 숭실학교를 마친 후 1918년 10월 장성읍에 예배당과 사립 숭실학교를 세워 교인과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사상을 전했다. 장성읍의 만세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정선유는 교인과 학생, 청년들과 함께 3월 21일에 장성읍내를 휩쓸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헌병대가 무력으로 탄압했지만 이들은 장성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 밤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이어갔다.

가장 대규모는 4월3일 일어난 북이면 모현리 시위였다. 4월3일은 모현리 사람들이 매년 즐겨오던 음력 3월3일의 화전놀이 날이다. 마을 앞 냇가에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은 광주와 장성 만세시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들도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류상설·고용석·정병모 등이 앞장서고 20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뒤따랐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일본 헌병대는 류상설 등을 주동자로 몰아 체포했다.

울분을 참지 못했던 마을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 헌병주재소로 몰려 가 석방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고 정병모·신태식·신상우·신국홍·정상순·오상구·박광우 등을 검거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모현리 사람들의 투쟁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이날 밤부터 봉화시위에 합세하며 만세를 외쳤다.

장성에서는 6차례의 시위가 있었고 참가인원은 15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의 진압에 의해 사망자는 19명·부상자는 15명·검거자는 15명이나 될 만큼 격렬했다.

담양 출신 독립운동가 송진우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고하 송진우선생 기념관’.






◇담양= “황새가 날아와 학의 둥지를 빼앗으니 학이 비탄에 젖었다.”

담양의 3·1운동은 담양읍에 거주하는 10대 후반~20대 전반 청년층이 주도했다. 농업·상업·회사원·학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광주의 영향을 받아 진행했으나 이들은 나름대로 계획을 수립해 상당량의 태극기 등을 제작했고 격문에서는 조선과 일본을 학과 황새로 비유하는 등 풍자 정신도 보였다.

1919년 3월 중순 담양읍 천변리에 사는 정기환은 광주에 다녀오면서 만세시위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담양에 돌아 온 그는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 국한종·정경인·임민호 등을 불러 광주 상황을 알려준 다음 “우리들도 방관할 일이 아니므로 서둘러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라고 말했다.

국한종 등은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시위 방법과 날짜 등을 협의하고서 동지를 모았다. 이들은 3월18일 담양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양각산에 숨어 제작했다. 임기정은 담양보통학교 3~4학년생인 김홍섭·김길호와 연락해 각자 동급생들을 동원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다.

3월17일이 되자 임기정 등은 조선인을 학, 일본인을 황새에 빗대 “황새가 날아와 학의 둥지를 빼앗아 1700여 학이 비탄에 젖어있다”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했다. 또 하늘이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며 황새를 쫓아낼 시기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18일 새벽 격문과 태극기를 시장통 사거리에 숨기는 등 시위를 착실히 준비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돼 만세운동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정기환 등 9명이 검거돼 정기환·임기정은 각각 징역 2년, 국한종·정경인·임민호 등은 각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비록 첫번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만세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이듬해 1월 창평면에서는 조보근·한익수 등이 동지 10명과 함께 수십 장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1920년 1월 23일 이들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가를 합창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창평면 소재지를 행진했다. 이로 인해 일제경찰에 붙잡힌 조보근은 징역 1년, 한익수는 징역 8월을 받았다. 향토사학자들은 창평면의 만세운동을 정기환 등이 계획한 담양읍 시위의 연장선상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 3·1운동 관련 담양 출신 인물은 송진우(1890~1945)를 주목해야 한다. 송진우는 일찍이 장성 출신 의병장 기삼연(1851~1908)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기삼연은 을미사변을 계기로 1896년 의병을 일으킨 후 체포됐다가 탈옥해 송진우 생가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이후 송진우는 창평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수학하며 인연을 맺었다.

1915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송진우는 4년 뒤인 1919년 1월 도쿄에서 귀국한 유학생 송계백을 만난 것을 계기로 국내 3·1운동을 기획했다. 그는 현상윤·최린·최남선 등과 자주 만나며 천도교와 기독교 연합을 주선하는 일을 담당했다.

일제로부터 3·1운동 주도인물 48인으로 분류된 그는 3·1운동 직후 체포됐다. 일각에는 1920년 10월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아 감옥에 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1년 반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다.

송진우는 1921년 동아일보 제3대 사장, 1927년 동아일보 제6대 사장을 역임하며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을 맞은 그는 같은해 9월 한국민주당을 만들고 수석총무로 활동하다 신탁 문제를 놓고 좌익 세력과 대립하다 암살 당해 세상을 떠났다.

/담양=김용희·김한영 기자 kimy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