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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식 칼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2019년 01월 16일(수) 00:00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는 말이 있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 선왕이 정치에 대해 묻자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왕도(王道)는 자연스레 열린다’며 민본주의 사상가 맹자가 들려준 경구다. 맹자는 나아가 백성이 바른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일탈에 빠지기 쉬운데 그들이 죄를 범한 뒤에야 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백성을 그물질(罔民)하는 것과 같다고 충고했다.

2300여 년 전 맹자가 말한 항산(恒産)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생계를 유지할 만한 생업(生業)을 말함이 아니었을까. 요즘 시대적 화두가 된 ‘일자리’ 말이다. 특히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는 증표다. 하지만 부족한 일자리는 되레 청년들을 절망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취업이 안 되니 연애나 결혼은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내고, 결혼을 하지 못하니 아이도 낳을 수 없다. 저출산 고령화의 위기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꿈과 희망이 싹틀 리 없다. 포기해야 할 게 너무 많은 ‘N포 세대‘의 비극이다.

‘촛불 시민’의 염원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좋은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정하고 대통령이 직접 일자리위원장을 맡았다. 일자리 상황판까지 설치하고 수십 조 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하지만 지난해 실업률은 3.8%로 17년 만에 가장 높았다. 청년 체감 실업률도 22.8%까지 치솟았다. 고용 지표가 부진을 거듭하면서 급기야 ‘일자리 쇼크’ ‘고용 참사’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최근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광주형 일자리’는 이처럼 일자리가 무너지는 비상 상황에서, 임금을 적정 수준으로 낮추는 대신 기업의 투자를 유도해 고용을 늘려 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방식도 획기적이었다. 노사민정의 사회적 대타협을 토대로 기업은 경쟁력을 키우고, 노동자에게는 고용 안정과 삶의 질을 보장해 주는 모델이었다. 출발점은 민선 6기인 2014년 윤장현 시장의 공약이었다. 당시 광주에서는 부족한 일자리 때문에 매년 수천 명의 청년들이 수도권 등지로 ‘취업 유랑’을 떠나는 상황이었다.

지역 차원의 구상은 3년 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국가적 어젠다로 떠올랐다. 특히 지난해 6월에는 현대자동차가 투자 의향서를 제출하며 급물살을 타기도 했다. 사업 구상은 광주시와 현대차가 공동 투자해 빛그린 산업단지에 완성차 공장을 짓고, 근로자 1000여 명을 고용해 연간 10만 대의 경형 SUV를 생산하겠다는 것이었다. 직간접 고용 효과는 협력업체를 포함 1만 20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지역 노동계가 임금 수준 등의 불투명을 이유로 위원회에서 탈퇴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진통 끝에 지역 노동계는 지난해 11월 말 광주시에 협상 전권을 위임했고 시와 현대차는 합작법인 설립안에 잠정 합의했다. 근로 시간과 초임 연봉은 주 44시간에 3500만 원으로 잡았다. 기존 현대차 초봉에 비해 임금을 낮추는 대신 정부와 광주시가 주택·교육·의료 등을 지원해 실질 임금을 높이는 방안도 포함됐다. 지난달 4일에는 광주시 노사민정협의회의 공동 결의까지 나와 4년여 만에 결실을 거두는 듯 했다.

성사 직전에 발목을 잡은 것은 노사민정이 의결 과정에서 ‘신설 법인의 임금 협상을 생산 목표 대수 35만 대 달성 때까지 유예한다’는 조항을 삭제하거나 수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현대차는 수정안을 거부했고 협상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사실 ‘광주형 일자리’는 역대 정권의 차별과 소외 정책에 따른 산업 기반 취약으로 섬처럼 고립돼 온 광주가, 청년들에게 미래를 열어 주기 위해 마련한 자생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 바탕엔 나눔과 연대, 대동(大同)의 ‘광주 정신’이 깔려 있다. 국내 최초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일자리 창출 시도는 그렇게 잉태됐고 이를 지방 정부와 지역 사회가 주도한 점은 더욱 의미가 있다 하겠다.

숱한 이견과 갈등이 있었지만 임금 협상 유예 조항을 제외한 적정 임금, 적정 근로 시간, 원·하청 개선, 노사 책임 경영 등 4대 원칙에 합의를 이룬 것도 이런 공감대가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광주시의 진정성 있는 소통과 설득, 지역 노동계의 통 큰 양보, 22년 만의 국내 투자라는 현대차의 의지가 없었다면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협상 주체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이제 딱 하나의 관문만 남았다. 임금 협상 유예는 노사가 역지사지로 소통하고 절충하면 조율이 가능한 사안이다. 광주형 일자리의 본보기가 된 독일 폭스바겐의 ‘아우토(Auto) 5000’ 성사 과정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노사는 협상 과정에서 충돌을 거듭했고 급기야 결렬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 양측을 중재한 것은 당시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였다.

광주형 일자리 역시 중앙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중재와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와 기자회견을 통해 ‘광주형 일자리는 광주 지역의 문제가 아닌 새로운 일자리의 희망’이라고 했다. ‘노사가 지혜를 모아 주면 정부도 전폭 지원하겠다’고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광주시 역시 ‘노사 상생 도시’를 선언하며 현대차 및 지역 노동계와 협상을 재개했다.

저성장이 고착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모든 경제 주체들이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선택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 실험의 중심에 광주형 일자리가 있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낯설고 힘든 길이지만, 성공하면 대한민국 일자리와 노사 관계 패러다임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중대 기로다. 노사민정이 다시 한 번 신뢰를 씨실로 상생을 날실로 삼아, ‘광주형 일자리’라는 하나의 희망을 함께 엮어 나가야 한다. 우리의 미래인 청년들이 더 이상 절망의 그물에 갇혀 헤매지 않도록.

/who@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