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호 영암 신북성당 주임신부] 우리의 소박했던 삶을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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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목하는 영암 신북 성당은 시골 성당이지만 초등학생 친구들이 많다. 저는 작년 2018년 마지막 주일 미사 중에 주일 학교 친구들에게 새해 소망이 무엇인지를 물어 보았다. 왜냐하면 2019년 새해에는 친구들이 기쁘고 행복한 한 해를 맞이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이런 저런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큰 소리로 “돈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머지 15명이 동시에 노래를 부르듯이 “돈! 돈! 돈!”하고 외쳤다. 친구들이 즐거움이나 행복이라고 대답하길 원했다. 그러나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대답에 마음이 답답했다.
2015년 12월 투명사회운동본부 윤리연구센터는 초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정직 지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나라 고교생의 56%, 중학생의 39%, 초등학생 17%가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라고 응답했다.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조사에 고등학생 45%, 중학생 30%, 초등학교 19%가 ‘그렇다’고 답했다.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이 답변이 참 서글프다.
그런데 우리의 청소년들이 왜 이런 답을 하는 것일까? 세계의 모든 언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는 속담이 있다. 설문 조사 발표에서 드러난 것처럼 청소년들의 대답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회적 문제나 이슈들은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은 우리 사회와 어른들을 통해서 배운다. 그래서 설문 조사 결과처럼 그렇게 응답한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는 왜곡된 자본주의에 묻혀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있다.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의 교육은 결과를 중요시하는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모든 가치의 중심은 인간이다. 그런데 그 가치가 땅에 떨어져 찾아볼 수가 없다. 가정 불화와 파괴, 높아지는 이혼율, 청소년 범죄의 증가, 학교 폭력, 자살 등의 문제들이 발생하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아픔을 안아 줄 것인가? 그리고 누가 청소년들을 즐거움과 행복의 삶으로 이끌어줄 것인가?
불과 20~30년 전 만해도 우리의 삶은 참 소박했다. 우리는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수수함을 지녔다.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았다. 저녁에는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고,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의 소박한 선물인 귤과 통닭으로 가족이 오순도순 나누었다. 가난한 이웃이 있으면 조금씩 모아 함께 나누기도 했고, 장례나 슬픈 일을 겪는 이웃들이 있으면 우리는 함께 했다.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았던 이웃들과 함께 서로의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었고, 서로가 작은 것에 감사하는 소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소박했던 삶은 새로운 신으로 등장한 ‘돈’에 의해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서로의 관계성은 경쟁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함께 돌봐주었던 아이들도 이제 서로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적이 되어 버렸다.
2013년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Evangeli Gaudium)이라는 권고문을 발표했다. 교황은 이 권고를 통해 현대의 고삐 풀린 ‘소비주의’와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저서에서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것은 바로 배척입니다”고 말했다. 교황은 돈의 노예가 되어 무너져 버린 인간성 회복을 위해 세상을 향해 외쳤던 것이다.
2000년 전 예수가 세상에 오시어 당신 몸을 바쳤던 이유는 인간 구원이었다. 예수는 노예로부터의 해방, 곧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위해 희생하셨다. 결국 그는 물질의 우상과 경쟁으로 무너져버린 인간성 회복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바치시고 부활하셨다.
2019년 기해년 우리의 삶이 소박한 삶, 거짓 없고 꾸밈없는 수수한 삶으로 회복되기를 바란다. 특히 청소년들이 새해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즐거움과 행복이라고 답하면 좋겠다. 그에 앞서 어른들이 먼저 청소년들을 위해 즐거움과 행복의 답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왜곡된 자본주의에 묻혀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있다.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의 교육은 결과를 중요시하는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모든 가치의 중심은 인간이다. 그런데 그 가치가 땅에 떨어져 찾아볼 수가 없다. 가정 불화와 파괴, 높아지는 이혼율, 청소년 범죄의 증가, 학교 폭력, 자살 등의 문제들이 발생하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아픔을 안아 줄 것인가? 그리고 누가 청소년들을 즐거움과 행복의 삶으로 이끌어줄 것인가?
불과 20~30년 전 만해도 우리의 삶은 참 소박했다. 우리는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수수함을 지녔다.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았다. 저녁에는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고,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의 소박한 선물인 귤과 통닭으로 가족이 오순도순 나누었다. 가난한 이웃이 있으면 조금씩 모아 함께 나누기도 했고, 장례나 슬픈 일을 겪는 이웃들이 있으면 우리는 함께 했다.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았던 이웃들과 함께 서로의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었고, 서로가 작은 것에 감사하는 소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소박했던 삶은 새로운 신으로 등장한 ‘돈’에 의해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서로의 관계성은 경쟁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함께 돌봐주었던 아이들도 이제 서로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적이 되어 버렸다.
2013년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Evangeli Gaudium)이라는 권고문을 발표했다. 교황은 이 권고를 통해 현대의 고삐 풀린 ‘소비주의’와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저서에서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것은 바로 배척입니다”고 말했다. 교황은 돈의 노예가 되어 무너져 버린 인간성 회복을 위해 세상을 향해 외쳤던 것이다.
2000년 전 예수가 세상에 오시어 당신 몸을 바쳤던 이유는 인간 구원이었다. 예수는 노예로부터의 해방, 곧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위해 희생하셨다. 결국 그는 물질의 우상과 경쟁으로 무너져버린 인간성 회복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바치시고 부활하셨다.
2019년 기해년 우리의 삶이 소박한 삶, 거짓 없고 꾸밈없는 수수한 삶으로 회복되기를 바란다. 특히 청소년들이 새해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즐거움과 행복이라고 답하면 좋겠다. 그에 앞서 어른들이 먼저 청소년들을 위해 즐거움과 행복의 답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