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현 화순 용현사 주지스님] 일상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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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현 화순 용현사 주지스님] 일상의 반란
2018년 09월 14일(금) 00:00
핸드폰을 새로 장만했다. 나름 기종이나 요금제 상품 등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했다. 기계는 해외 직구로 구입하고, 통신사며 요금제는 인터넷에서 알뜰폰으로 가입하기로 했다. 핸드폰을 주문하고 내 손에 받기까지 3주. 여기까지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이 내 손에 들어온 후부터 다시는 기억하기도 끔찍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몰려왔다. 꼬일 대로 꼬인 일련의 과정은 모두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전화 불통 상태로 이틀을 지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와중에 번개를 맞아 인터넷도 불통이 되어 버렸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래저래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이미 벌어진 일. 일상의 반란이었다. 우렁각시처럼 아무런 존재감 없이 나를 위해 묵묵히 일하던 것이 멈춰버렸다. 당장 전화가 불통된다고 해서 큰일날 것도 아닌데, 몇 번의 터치 만으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 것이 갑자기 요지부동이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부드럽게 흘러가던 일상에 예고도 없이 털거덕하고 브레이크가 걸렸다. 순탄한 일상이 엉망이 되었다.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핸드폰이 짜증을 받아줄 리 만무하지만 짜증은 이런저런 사정 같은 건 따지지 않는 법.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이 급선무이자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상이란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순종적인 나의 왕국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이다. 세상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 이 말은 곧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국의 경계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해질 수록 나의 왕국에 대한 애착은 더 커진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요즘 말로 하자면 ‘소확행’은 나의 왕국을 자각하고 예찬하는 마음이며, 나의 영토 밖을 쓸데없이 기웃거리지 않고 나에게 충성하는 백성들을 돌아볼 때 느끼는 감정이다.

내가 거느리고 있는 백성들은 대부분 기계이거나 상품 아니면 상품화된 서비스이다. 핸드폰, 자동차, 세탁기, 텔레비전, 선풍기, 에어컨, 컴퓨터… 이들이 나의 백성들이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같이 사람이 했을 일들을 기계들은 군말 없이 대신해주고 있다. 반세기 전 만해도 잔치를 벌이려면 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온종일 부산스럽게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트에 가서 이미 다 만들어진 상품들을 ‘사오기만’ 하면 된다. 생일잔치를 준비하려면 케익, 촛불, 풍선, 즉석 떡볶이, 초밥, 와인… 이런 것들을 사와서 차리기만 하면 된다. 마트에 팔지 않는 탕수육, 꽃다발 같은 것은 다른 가게에서 사면 된다.

옛사람들과 비교하면 왕이 부럽지 않은 삶이다. 나의 왕국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각종 전자 기기들은 우리들의 삶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우리들에게 이들은 기계 이상의 존재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다. 요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 살고 있으니 평범하기 짝이 없다. 오랜 시간동안 익숙해져서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땀이자 노동의 결정체이다. 우리는 무수한 이들의 보이지 않는 도움 없이는 한시도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허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급하고 불안하고 그래서 짜증으로 번지려는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런데 ‘애초에 미리 신경 써야 할 것들을 잘 챙겨 보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걸….’ 하는 생각이 들자,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하는 자조 섞인 한탄이 새나온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대책 없이 화부터 내는 것이나,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못난 놈이라고 자신을 깎아 내리는 일이나 외양만 다를 뿐 뿌리는 꼭 같다. ‘나’라는 놈의 못된 장난이다.

예전 스님들은, “주인공아! 내 말을 들어라. 숱한 사람들이 참된 이치를 깨달었건만 너는 어찌 아직도 애욕의 긴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라며 수시로 자신을 경책하였다. 욕심에 눈이 멀어 스스로에게 속지 말라고 간절하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원래 주인공은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일상이라는 왕국의 왕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비극의 주인공 역할에 심취하는 것도 실제 주인공인 ‘나’가 아니라 거짓된 ‘나’인 셈이다. 중생이 달리 중생이 아니다. 자신에게 속고도 남에게 버럭 화내는 것이 중생이다. 참으로 우습고도 슬픈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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