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현 화순 용암사 주지스님] ‘재하’ 같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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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현 화순 용암사 주지스님] ‘재하’ 같은 남자
2018년 03월 23일(금) 00:00
새벽 예불을 하려고 법당에 들어가니 법당의 초파일 연등 불이 켜지질 않는다. 새벽 4시가 되면 자동으로 불이 켜져서, 저녁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자동으로 불이 꺼졌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불이 들어와야 할 시간인데 들어오질 않는다.

‘저것들이 왜 저러지?’ 단자함을 열어보고, 타이머를 봐도 아무 이상이 없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불이 켜지지 않는다. 결국 포기했다. 어둔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연등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깊은 침묵에 빠져 있다. 따지고 보면 LED등을 이쁘게 장식한 것에 불과한데 살아 숨쉬는 생물(生物)같다. 한낱 대상에 불과한 것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평온했던 일상이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요즘 한창 미투운동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권력은 사람을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권력을 누리는 자리에 가까이 있을수록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은 떨어진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힘없는 여성들은 한낱 대상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에 아무런 저항도 없던 것들의 반란, 그러나 성적 차별은 본질적으로 권력의 문제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일부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권력의 가장자리에 겨우겨우 자리하고 있는 나같은 남자 역시 성적 차별의 잠재적 가해자에 속한다.

최근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청춘을 위한 힐링 영화로 입소문 나면서 조용히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여주인공이 영화를 끌어가는 모양새이지만, 여주인공 ‘혜원’의 어릴 적 친구인 ‘재하’라는 인물도 영화 전체의 흐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재하’는 이 시대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남성의 입장에서 보기에 몹시 수긍하기 힘든 캐릭터다. 청춘의 남녀가 등장하니 당연히 둘 사이에 썸을 탈 만도 한데, 썸을 탈 듯 말 듯하다가 만다. ‘재하’는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친구. 혜원이 원할 때, 혜원이 원하는 방식대로, 혜원의 옆에 있어주는, 혜원이 바라는 친구의 역할을 너무나 충실하게 수행한다. 많은 여성들이 바라지만 정작 남자에게는 너무나 힘든 역할이다. ‘재하’는 ‘혜원’이 필요로 하는 딱 그 만큼만 ‘혜원’의 삶에 들어온다.

이 사회의 모든 남자들이 ‘재하’처럼만 처신한다면 미투운동은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하’라는 인물은 감독이 창조한 영화 속 인물이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재하’에게서 자비를 몸소 실천하며 보살의 길을 걷는 수행자의 모습이 배어 나온다.

자비(慈悲)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중요한 덕목이다. 자(慈)는 기쁨을 베푸는 것이며, 비(悲)는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비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진실되고 순수한 우정이며,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의 자애로움같은 것이다. “모든 생명 있는 자여, 행복하여라, 평안하여라, 안락하여라”(쌍윳따니까야, 145)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자비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만인의 벗이며, 만인의 동료다. 모든 생명 있는 것에게 정을 느끼는 사람이다.”(테라가타, 648)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불교의 수행자는 ‘모든 생명있는 것들의 친구’이며, 자비는 인간이 실현해야 할 이상이다.

금욕의 길을 걸으며 힘든 고행을 감수해야만 수행자인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철주야 용맹정진해야만 수행자가 아니다. 불교의 보살은 자비를 실천하는 자이다.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자라면 누구든 수행자다.

‘재하’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비춰지는 것은 자비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성적 욕망은 생물학적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매우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들의 사랑은 남성 중심적이고 권력 중심적인 사회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왜곡되고 변형된 채 고착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자비에 대해서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고장난 연등은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다. 법당에 들어갈 때마다 불 꺼진 연등은 내게 묻는다. ‘과연 너는 누군가의 재하가 되기 위해서 한 순간이라도 진지하게 노력한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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