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묵 선덕사 주지] 포항과 빛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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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묵 선덕사 주지] 포항과 빛고을
2017년 11월 24일(금) 00:00
평창 동계올림픽 때문인지 올해는 밑단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이 유행이란다. 온 몸을 감싸는 두툼한 옷자락에 안도하는 거리의 표정에서 겨울을 본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억새는 바람결에 흔들리고, 단풍으로 화려했던 나뭇잎은 산들바람조차 버겁다. 일찌감치 잎을 떨군 가지는 막을 수 없는 바람을 가르며 춥다고 운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자서어록’에 기록된 당나라 때 어떤 시인은 ‘산 속에 사는 스님은 날짜를 헤아릴 줄 몰라도 낙엽 하나를 보고 세상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山僧不解數甲子 一葉落知天下秋)’고 했고, 비슷한 말로 ‘회남자’ 설산훈편에는 ‘낙엽 하나를 보고 한 해가 저물어 감을 알고, 병 속의 얼음을 보고 천하가 겨울임을 안다(見一葉落而知歲之將暮 睹甁中之氷而知天下之寒)’고 했다. 작은 징조에서 큰 흐름을 읽는 것인데 실상 큰 흐름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낱낱 현상들 속에서 읽혀진 것을 추리하고 추상하여 붙이는 이름이 소위 ‘큰 흐름’이다. 그러니 롱패딩 옷자락에서 겨울을 보는 것이 과히 틀리지 않으리라.

작은 것 하나는 단지 그것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을 머금은 하나이다. 지금의 순간은 단지 이 순간이 아니라 모든 과거가 응집되고 모든 미래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신라 의상조사가 80권의 화엄경을 한 페이지로 요약한 법성게 속에 정리해놓은 말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이고, 하나를 온전히 해 내면 다른 것에도 능히 통할 수 있는 것일 테다.

포항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많은 이재민이 생겨났다. 건물과 차량이 파손되고 살림살이가 망가졌는데 천재지변이라 제대로 보상을 받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쫓기듯 삶터에서 뛰쳐나와 체육관으로 교회로 피신한 사람들, 추운 날씨까지 더해지니 얼마나 고단하랴. 그뿐 아니다. 수능시험이 일주일 늦춰짐에 따라 60만 응시생들과 가족들도 혼란에 빠졌다. 실로 땅만 흔들린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의 삶이 흔들렸다. 그런데 일부 언론 보도를 보면 지열발전소에서 고압으로 땅에 물을 주입하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고, 지진의 강도가 점점 강해졌다고 한다. 그것이 지진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합리적으로 의심할만한 관련성이 보인다고 한다.

하나의 낙엽에서 천하의 가을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차례 반복되는 현상에서 인과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면 지나치게 안이하거나 우매했던 것이 아닐까. 혹은 사업 성공이라는 집단적 욕망이 진실을 보는 눈을 가려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온 국민의 삶이 함께 흔들리는 것은 우리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별개인 것 같지만 관계의 그물로 보면 수많은 관계로 엮여 있다. 실로 한 몸이며 한 생명이다. 발이 아픈데 아무 상관없이 즐거운 손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발이 아프면 그 아픈 곳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온 몸은 그 아픈 곳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다. 머리나 심장이 몸의 중심이 아니라 아픈 곳이 중심이다.

예전에 머리는 높고 귀한 것이라는 관념을 가진 어떤 이는 머리를 숙여 세수하지 않았다고 하니 누워서 잠을 자기는 했을지 모르겠다. 높고 낮음 없이 바닥에 누웠을 때 자신이 가장 평화롭다는 것은 그는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발에 가시가 박혔을 때 온몸으로 아파했음을 왜 깨치지 못했을까.

변방이며 부분이라고 나 자신을, 우리 마을을 작게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없는 대한민국은 없다. 빛고을 없는 우리나라도 없다. 대한민국은 나로 인하여 대한민국이며, 내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것, 빛고을과 대한민국도 그렇고, 포항도, 진도 팽목항도, 사드로 아픈 성주도 그렇다. 어딘들 그렇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 가운데 지금 아픈 곳이 가장 대한민국이라는 것, 그래서 어제 가장 대한민국이었던 빛고을은 오늘의 포항과 한 몸이다.

찬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 하나를 본다. 노란 잎사귀에 ‘한 몸 평화’가 고백처럼 아름답게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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