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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찬석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정사목] 위령 성월(慰靈 聖月)
2017년 11월 10일(금) 00:00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서 11월은 달력의 마지막 달이다. 이런 시기에 교회는 위령 성월을 지내며 죽음을 묵상하며 지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언젠가 나도 그 중에 한 명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죽음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인간의 숙명(宿命)이다. 죽음은 모두에게 예외 없이 찾아오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건물 엘리베이터에는 4층 표시가 없다. ‘4’라는 숫자가 죽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피해온 것이다.

중국의 진시황처럼 죽음을 피하게 해주는 불로초(不老草)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 것은 분명한 순리(順理)이다. 그러나 죽음이 단순히 우리의 마지막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커다란 고통이겠지만,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다’는 것은 믿고 있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믿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고통 너머에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이란 죽음으로의 점진적인 굴복이어서,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나날 중 한 부분을 매일 죽음에 바치고 있다”고 그의 저서 ‘신국론’에서 밝혔다. 또한 톨스토이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고 했다. 이처럼 죽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며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다. 이렇게 죽음은 보편적이고 불가피(不可避)하다는 것과 함께, 대체불가(代替不可)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만 가진 것은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면서도 죽음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또한 죽음을 잘 준비하면서 생활한다면 더욱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 근현대사를 보면,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죽었다. 독살 의혹 속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3·1운동이 일어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은 일본의 비인도적인 진압으로 실패로 끝났으나, 일본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자주민의 저력을 국내외에 떨쳤고,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날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 경찰이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당했다.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경 마산 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인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 떠올라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승만 자유당의 장기 집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은 비록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고,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인 박종철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하게 되고, 6월 9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당하다 7월 5일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6월 민주항쟁의 결과 노태우는 6·29 선언을 하게 되었고, 제 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령 성월은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가치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또한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이 꿈꿔왔던 세상을 우리도 함께 꿈꾸는 시간이기도 한다. 그래서 위령성월 감사기도문에는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를 증명해 주셨다. 진정한 삶은 어쩌면 죽은 뒤에 가능한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죽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이루어진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가 믿고 바라는 영원한 생명에로 옮아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의미 있는 사건이며, 죽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더욱 값지게 다가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