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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묵 선덕사 주지] 영화 ‘산상수훈’의 안목
2017년 10월 27일(금) 00:00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물을 네 가지로 본다는 것인데, 사람은 물로 보고 천상의 신들은 보배로 보며 물고기는 공기로, 아귀는 피고름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인데 착각해서 피고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귀에게는 전적으로 피고름이라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의 사실을 똑같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 자기 경험 속에서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광주여자대학교에서 마음(MAUM)교육 프로그램 일환으로 마련한 ‘산상수훈 4인 4색 토크시사회’에 다녀왔다. 영화 산상수훈은 여덟 명의 청년들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놓고 진리를 찾아가는 상황을 담고 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었는가, 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가, 하나님이 계신데 왜 세상에 악이 가득한가,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왜 나에게 죄가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왜 내 죄가 없어지는가 등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왜 이런 토론을 어두운 동굴 속에서 했을까? 밝음이 없는 동굴은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플라톤의 동굴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불교에서도 진리에 대한 무지를 뜻하는 무명(無明)은 어두움이다. 한편으로는 믿음을 강조함에 따라 이러한 질문을 공개적으로 하기 어려운 종교적 분위기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본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은 스님의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어떤 이들은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거기에 맞춰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과학자들은 ‘결론’을 미리 정하고 실험을 통해 그 결론을 증명하려고 한다. 미리 정한 결론을 가설이라고 하는데, 실험 과정에서 가설이 흔들리면 또 다른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런 면에서 과학자의 핵심 능력은 가설을 설정하는 것이고, 이것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기도 하다.

대해스님 또한 하나님과 천국과 우리 자신이 개별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성경 말씀을 통해 증명해보고자 했다. 이 가설은 매우 불교적인 입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 뿐 아니라 현대 철학은 모두 그런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또 불교 입장에서 가설을 세웠다고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가르침이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 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만들고 가꾸어 온 인류의 공유자산이기 때문이다.

대해스님이 질문하고 발견하여 해석한 성경은 다른 색깔로 다가온다. 신의 피조물이며 죄인인 인간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인 인간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면 그동안 선악과의 효과 때문에 가려졌던 하나님의 모습이 발현되면서 하나님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으로 살아간다면 지금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이렇게 보면 성경은 불교와 용어를 달리할 뿐 의미에서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기성 종교 입장에서는 불편할 일이다.

성경을 이렇게 보는 것은 틀린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성경은 누군가의 해석이며, 또 재해석이다. 어떤 것이 옳고 틀린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자기 안목에 따라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진리는 고정된 모습이나 이론으로 있지 않기에 다른 입장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견해의 감옥에 스스로 갇히는 것이 된다.

영화를 만든 대해스님은 모든 종교의 본질이 같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종교별로 교주가 다르고 교리도 다르며 종교 의식도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본질이라는 표현은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좋은 의도는 충분히 읽힌다.

우리는 다른 것을 낯설어하고 불편해한다. 모든 것은 본래 같을 수 없음에도 종교적 관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대립하고 다툰다. 다름에서 다르지 않음을 보고, 같음에서 같지 않음을 보면서 공존의 가치를 알고 종교끼리 잘 어울려 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리라.

만산홍엽의 계절이다. 무등산 자락의 울긋불긋한 나뭇잎을 보면 한 가지 색이 아니다. 여럿이 함께 잘 어울려야 아름다운 것, 우리 삶도 그렇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