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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권 서정교회 담임목사] 꽃 할머니께 보내는 8월의 편지
2017년 08월 18일(금) 00:00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한 김재림 할머니, 고 김학순 할머니, 최근에 돌아가신 김군자 할머니 성함을 조용히 불러 보는 아침입니다. 올해는 무척 더운 날씨였습니다. 이제 입추를 지나 처서가 눈앞에 있지요. 그래서인지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광복 72주년을 보냈습니다. 그 가운데 조선여자근로정신대가 있지요. 바로 양금덕 할머니입니다. 당시 일본인 교사와 교장의 사탕 발림에 일본으로 강제동원 되었지요.

1944년 5월경 패색이 짙어진 일본은 전시 노동력을 위해서 어린 초등학생 또래 13세 14세 소녀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 등에서 동원된 소녀들은 여수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셨다지요. 이어서 대표적 공업도시인 나고야의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배치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굶주림과 혹독한 감시속에서 하루 8∼10시간 동안 강제노동에 시달렸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 하셨지요.

그때 할머니와 함께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된 사람이 광주·전남에서 150여 명이랍니다. 찬 겨울에 장갑하나 없이 맨손으로 철판을 만지고 찬물에 부품을 씻느라 손등이 퉁퉁 붓고 갈라져 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울컥합니다. 특히 힘든 것은 배고픔이라고 하셨지요. 이런 세월 가운데 약속했던 임금 한푼도 받지 못하고 1945년 해방이 됐습니다. 돌아와서는 일본 다녀 온 것이 위안부인줄 알고 가정이 파탄 났다지요. 참 어처구니없는 일들입니다.

지난한 세월을 보내고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지요. 패소 이후 광주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2009년)이 결성돼 할머니와 손을 잡게 되었지요. 할머니를 그때 뵙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군함도도 함께 관람하면서 씩씩하게 응원하시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으로 사시는 모습이 목사인 저는 마치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있어요.

또 다른 할머니를 기억합니다. 김재림 할머니입니다. 지난 8월 11일 법원은 미쓰비시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하여 미쓰비시의 불법 행위를 인정하고 배상명령을 내렸지요. 그때 김 할머니는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다’면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땀과 눈물을 닦으면서 한 손에 지팡이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저의 손을 붙잡고 법원 길을 나올 때 할머니의 그동안 고통과 아픔을 느꼈지요. 할머니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십니다.

나눔의 집에 계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소속된 교단 총회 인권위원회에서 방문한 적도 있지요. 유엔과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성노예’ ‘성 폭력 피해자’라는 표현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지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켜온 25년간의 그 아름답고 경이로운 용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시위 ‘수요집회’에 함께하지 못해 늘 죄송하기만 합니다.

길원옥 할머니께서 유럽의회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이끌어낸 연설을 기억합니다. 그때 할머니는 “저는 해방되고서 아주 긴 세월을 제 과거가 부끄러워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용기를 내어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시위에서 지금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아이들을 보면서 제게는 큰 숙제 하나가 생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올바르게 밝혀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광주에서도 매월 첫째 수요일 ‘나비 모임’을 통해서 할머니들을 기억하고 함께 합니다. 우리 시대의 상처와 아픔으로 살아오신 할머니들, 하늘나라에서도 안식하지 못하시는 할머니들의 평화의 날갯짓입니다. 반드시 일본 위안부 합의 원천 무효를 이끌어내기 위해 행동하겠습니다.

할머니들의 건강을 위하여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