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발그니 서산동성당 주임신부] 부활의 두 여인
4월16일 교회는 부활예식을 했다. 이날은 세월호 3주기이기도 했다. 누가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알았을까? 예수님이 죽어 제자들이 실의에 빠진다. 이젠 어찌할 수 없다 생각하며 포기했을 것이다. 무덤에 갈 용기조차 없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자기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설마 그분이 돌아가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당히 내려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예수님은 돌아가셨고,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망연자실’이란 말이 이들에게 어울리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여인은 이들과 달랐다. 두 여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기에 너무나도 자신들의 삶이 허망해서 무엇이라도 하려고 했다. 사실 잃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래서 주먹이라도 쥐어보자 생각하며 무덤을 찾아간다.
나는 이 여인들을 3년 전 팽목항에서 만났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고 아이들이 돌아오지는 않을 텐데 하염없이 바다를 지키는 엄마들, 아이가 돌아오면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보려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엄마들, 하느님께 소리 내어 기도하는 엄마들, ‘신부님 우리 아이 착한데 하느님은 왜 그러냐’고 가슴을 두드리며 외치는 엄마들, 며칠씩 굶은 것도 잊은 채 아이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리는 엄마들, 그 여인들은 삼 년이 지나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지치지 않고 했다.
부활은 그들에 의해 알려졌다. 예수님의 죽음에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자들이 아니라 잃을 게 없어서 아무것도 않으면 미칠 것 같았던 그 여인들에 의해 알려졌다. 또한 모두에게 버림받았고 손가락질을 받았고 죽을 위험에 놓였던 그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며 사람으로 대해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을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그 엄마들이 팽목항에서, 광화문에서,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던 것은 자식에 대한 애절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엄마가 너희들을 구해내지 못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마들의 외침이 새로운 정부를 원하는 국민의 외침을 가져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부활은 이 힘없는 세월호 엄마, 가습기 살균제 피해 아빠, 소녀상을 지키는 소녀들, 촛불을 든 힘없는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1991년 교황 바오로 2세는 교황 레오 13세가 1891년 회칙 ‘새로운 사태’를 공표한 지 100주년을 맞아 회칙 ‘백주년’을 발표한다. 제자들의 망연자실한 행동은 정치인들의 정치일탈에서 비롯한다고 회칙 ‘백주년’은 말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요청되는 것은 정의와 윤리의 기준에 따라 검토되지 않고, 그 요구를 내세우는 집단들의 선거 영향과 재정적 계산을 위해서 검토된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의 일탈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불신과 무관심을 낳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하고 속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참여가 감소되고 시민 정신이 쇠퇴한다.”(47항)
박근혜 정부 4년을 산 국민들은 우리의 무관심이 얼마나 큰 재앙 가져왔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시민들이 일어나 무덤을 찾아가고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이들을 응원한다.
“교회는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 체제는 확실히 시민들에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중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배자들을 선택하거나 통제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 따라서 교회는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을 위하여 국가 체제를 점령하고 폐쇄된 지배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도와주면 안 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치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올바른 인간관의 기초 위에 성립한다. 민주주의는 참된 이상에 대한 교육과 양성을 통한 참여와 공동 책임 구조의 설립을 통한 사회 주체성의 향상을 위해서도 필요조건들이 채워지기를 요구한다.” (백주년 47항)
나의 한 표가 이 나라를 부활시킬 것이다. 선거를 하는 것만이 지배자들을 선택하고 통제하고 필요한 경우 대치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은 선거 참여이다. 우리나라의 부활에 나의 힘을 보태자.
부활은 그들에 의해 알려졌다. 예수님의 죽음에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자들이 아니라 잃을 게 없어서 아무것도 않으면 미칠 것 같았던 그 여인들에 의해 알려졌다. 또한 모두에게 버림받았고 손가락질을 받았고 죽을 위험에 놓였던 그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며 사람으로 대해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들을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그 엄마들이 팽목항에서, 광화문에서,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던 것은 자식에 대한 애절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엄마가 너희들을 구해내지 못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마들의 외침이 새로운 정부를 원하는 국민의 외침을 가져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부활은 이 힘없는 세월호 엄마, 가습기 살균제 피해 아빠, 소녀상을 지키는 소녀들, 촛불을 든 힘없는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1991년 교황 바오로 2세는 교황 레오 13세가 1891년 회칙 ‘새로운 사태’를 공표한 지 100주년을 맞아 회칙 ‘백주년’을 발표한다. 제자들의 망연자실한 행동은 정치인들의 정치일탈에서 비롯한다고 회칙 ‘백주년’은 말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요청되는 것은 정의와 윤리의 기준에 따라 검토되지 않고, 그 요구를 내세우는 집단들의 선거 영향과 재정적 계산을 위해서 검토된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의 일탈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불신과 무관심을 낳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하고 속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참여가 감소되고 시민 정신이 쇠퇴한다.”(47항)
박근혜 정부 4년을 산 국민들은 우리의 무관심이 얼마나 큰 재앙 가져왔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시민들이 일어나 무덤을 찾아가고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이들을 응원한다.
“교회는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 체제는 확실히 시민들에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중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배자들을 선택하거나 통제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 따라서 교회는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을 위하여 국가 체제를 점령하고 폐쇄된 지배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도와주면 안 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치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올바른 인간관의 기초 위에 성립한다. 민주주의는 참된 이상에 대한 교육과 양성을 통한 참여와 공동 책임 구조의 설립을 통한 사회 주체성의 향상을 위해서도 필요조건들이 채워지기를 요구한다.” (백주년 47항)
나의 한 표가 이 나라를 부활시킬 것이다. 선거를 하는 것만이 지배자들을 선택하고 통제하고 필요한 경우 대치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은 선거 참여이다. 우리나라의 부활에 나의 힘을 보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