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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현의 문화카페] 기억의 힘
2017년 01월 25일(수) 00:00
“아로나 아브라함, 게리 알버트, 메리 제인 부스, 데이비드 캐론….”

매년 9월1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의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911테러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식이 열린다. 지난 2001년 이후 한해도 거르지 않고 거행된 행사다. 15주년을 맞은 지난해 추도식에서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희생자 가족 등이 참석해 그날의 참상과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추도식의 하이라이트는 롤콜(Roll Call)순서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WTC)가 내려앉는 순간, 함께 사라진 2977명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는 의식이다. 여기에는 같은 날 펜타곤과 미국 생크빌에서 추락한 유나이티드 플라이트 93 항공기의 희생자, 1993년 WTC 폭탄 테러 기도로 사망한 희생자도 포함된다.

“누구의 사랑스러운 딸이었고, 자상한 아버지였으며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다”는 희생자들의 설명이 보태지면 추도식장은 더욱 숙연해진다. 희생자 2977명이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와 이름 하나하나가 불릴 때 전해지는 비극의 강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들의 고귀한 인생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아서다. 이름이 ‘기호’와 다른 이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꽃’ 중에서)는 시인의 말처럼.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흥행 열풍이 예사롭지 않다. 지난 22일 오후 3시를 기점으로 총 누적관객 302만 명을 돌파하며 역대 국내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가운데 최고 흥행작으로 떠올랐다.

영화의 주인공은 도쿄와 산골 마을 이토모리에 사는 마츠하와 타키다. 두 남녀 학생은 몸이 꿈속에서 뒤바뀌는 신비한 경험을 겪으며 혜성충돌로부터 마을과 주민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를 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자연스럽게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너의 이름은’이 수백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으는 코드는 ‘기억’과 인연이다. 주인공 마츠하와 타키는 점점 희미해져가는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으며 기적 같은 사랑을 꿈꾼다.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 잊혀진 기억의 끈을 놓지 않을 때 기적의 순간이 도래한다는 스토리는 실화보다 더 깊은 감동을 준다.

이제 며칠 후면 설이다. 겨울 바람 끝이 매서운 진도 팽목항에도 어김없이 설은 다가온다. 지난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맞는 세 번째 설이다. 하지만 아직도 찬 바다 속에 있는 미수습자 9명의 가족은 돌아오지 않는 아들과 딸을 기다리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최선의 애도라고 했던가. 우리가 그날의 참사, 9명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날은 멀지 않으리라.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