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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현의 문화카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016년 12월 14일(수) 00:00
1987년 10월19일 월요일. 뉴욕 링컨센터의 수석연출가인 버너드 거스턴(Bernard Gersten)은 하루 종일 담배를 물고 살았다. 이날은 미 다우지수 사상 유례없는 22.6%의 폭락장을 기록한 ‘블랙먼데이’. 월스트리트의 증권맨도 비즈니스맨도 아니었지만 거스턴의 가슴은 누구보다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그날 저녁 오프닝 공연을 앞둔 뮤지컬 ‘애니싱 고스(Anything goes·무엇이든지 된다)’ 때문이었다.

‘애니싱 고스’는 뉴욕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초호화 여객선 ‘S.S American’을 배경으로 승객들의 유쾌한 헤프닝을 담은 코믹 뮤지컬. 1934년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 속에서도 무려 450차례나 매진을 ‘찍는’ 진기록을 거뒀다.

거스턴은 1934년 뉴요커를 사로잡았던 ‘애니싱 고스’를 다시 무대에 올리기 위해 1987년 10월19일 공연을 목표로 3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그런데 이날 아침 청천벽력과 같은 증시폭락으로 오랫동안 공들여온 뮤지컬이 간판을 내려야 할 처지에 몰린 것이다. 실직자가 거리로 쏟아지는 판에 뮤지컬이라니. ‘브로드웨이의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 거스턴이라도 흥행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그날 저녁 첫 공연이 열린 링컨센터 부설 비비안 버몬트극장은 개막 1시간 전부터 관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총 1084개의 좌석은 1년 내내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했지만 시민들은 주린 배를 달래며 티켓부스로 향했다. 매스컴에선 “이런 뉴요커들의 삶의 여유가 문화 도시 뉴욕의 힘”이라는 평이 쏟아졌다.

근래 우리나라에도 각박한 일상을 문화와 예술로 힐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12일 문화체육관광부는 시행 3년째를 맞은 ‘문화가 있는 날’이 점차 생활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발표했다.

‘문화가 있는 날’은 국민들이 일상에서 문화를 쉽게 접하고 누릴 수 있게 매월 마지막 수요일마다 다양한 문화혜택을 주는 정부 사업이다. 문광부에 따르면 지난달 ‘문화가 있는 날’에 참여한 전국 문화시설과 단체의 프로그램 수는 2657개로 작년 11월(2081개)에 비해 27.7% 증가했다. 이는 처음 시행된 2014년 1월 883개였던 것과 비교하면 3배 이상으로 늘어난 수치다.

반가운 뉴스 하나 더. 문광부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여파로 내년도 문화정책예산이 국회에서 대폭 삭감됐지만 ‘문화가 있는 날’ 관련 예산은 162억원으로 오히려 10% 증액됐다고 밝혔다. 요즘처럼 불경기가 지속되면 가장 먼저 문화예술 분야가 직격탄을 맞는 만큼 문화예술관련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한 배려에서다.

일상이 각박해질수록 따뜻한 시 한편과 그림이 위안을 줄 때가 있다. 당장 먹고 사는 게 팍팍한데 무슨 한가하게 ‘그림타령’이냐고 하겠지만 평소 문화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안다. 예술적 감동과 함께 잊고 지냈던 일상의 여유를 되찾게 된다는 것을.

그러니 다가오는 세밑과 신년에도 문화로 행복한 나날이 됐으면 좋겠다. 1987년 ‘애니싱 고스’를 보며 10월 블랙먼데이의 암울한 밤을 달랬던 뉴요커들처럼.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