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르네상스 국가어항을 가다] 천년의 문화 실어나른 ‘남도의 나폴리’ … 복합휴양지로 뜬다
<중> 문화가 꽃피는 항구-강진 마량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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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항구는 수물산과 지역의 특산물이 거래되던 곳이었다. 뭍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터라 물산이 교류되고, 다양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한마디로 문화의 집결지이자 문화의 공급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찍이 우리나라는 항구를 거점으로 문화가 번성했다. 물산의 운반과 사람의 이동, 문화의 교류가 항구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양상은 바다가 지닌 본질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인 수용성과 맞물려 문화의 융합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강진에는 ‘미항(美港)’ 마량항(馬良港)이 있다. 마량항은 문화가 꽃피울 수밖에 없는 지리적 요건을 갖췄다. 이 같은 사실은, 먼저 강진이 자리하는 지형적 특질을 문화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일찍이 강진은 문화유산답사 1번지로 알려진 고장이다. 유홍준 교수가 지난 1993년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답사 1번지로 규정하면서, 강진은 전국적인 문화관광 도시로 발돋움했다. 영암과 장흥, 해남으로 둘러싸인 데다 중앙으로 강진만이 깊숙이 만입한 지형은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천혜의 요건으로 부족함이 없다.
작가 김훈은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에서 강진의 내륙을 파고드는 탐진만을 여인의 몸으로 묘사한 바 있다. “강진만의 바다는 따스한 요니(女陰)처럼 육지를 파고들어 조붓하고 아늑하였다. 등 푸른 여름산맥들이 그 요니의 바다를 따라서 만의 하구로 치닫고 있었다.”
유려한 문체로 풀어낸 탐진만의 모습은 자못 아름답고도 신비롭다. 작가의 비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강진의 문화가 강진 바다와 탐진강을 배경으로 피어났기 때문이다. 고려청자 도요지, 가우도, 다산초당, 영랑생가, 전라병영성과 하멜 표류지, 무위사와 백련사 등…. 고을 곳곳에 산재한 유서 깊은 문화와 유적은 왜 강진이 남도의 문화답사1번지인지, 왜 한국의 문화답사1번지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강진에서도 가장 ‘강진스러운’ 곳은 아마도 ‘남도의 나폴리’로 알려진 마량항(馬良港)일 것 같다. 마량은 조선시대 제주에서 싣고 온 말이 집결되는 항구다. 근동에 원마(元馬)와 숙마(宿馬), 신마(新馬) 등 말을 매개로 한 마을 이름이 많은 건 그 때문이다.
부두를 걷다보면 한때 이곳을 드나들던 어선들의 뱃고동소리와 말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량항에서 보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입체적인 시간의 변동이다.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닌 서로 상관하면서 굽이치는, 문화와 역사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강진사람들의 삶의 현장이다.
강진이 청자(靑瓷) 고장으로 불리게 된 데는 마량항으로 대변되는 해상로를 배후로 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고려청자의 90%가 강진에서 출토됐다. 강진이 가히 ‘문화의 보고’, ‘문화의 자궁’으로 불리게 된 근거는 이 마량항 때문이다.
강진의 도자기는 강진만의 넉넉한 바다와 풍요로운 햇살, 싱그러운 바람이 빚었다. 여인의 품처럼 넉넉하고 찰진 토질에서 청자와 도자기가 배태되었고, 이 흙속에서 풀과 꽃과 무수한 생명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마량항은 이처럼 문화를 견인하는 유서 깊은 항구로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수산물을 실어 나르는 운송지가 아닌, 문물이 교류되고 다양한 기능이 작동하는 문화 항구로서 말이다.
마량항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 다기능어항 시범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서부터다. 1984년 기본 계획이 수립돼 개발이 진행돼오다 2005년 본격적으로 다기능 어항 공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2006년 수변테크, 야외 공연장, 산책로 등의 시설이 새롭게 설치되고 친수·관광시설이 추가됨으로써 휴식·휴양의 공간으로 일대 변신을 이룬다.
예상은 적중했다. 천혜의 자연 환경에 친수시절과 문화공간이 갖춰지자 “역시 미항”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방파제를 따라 펼쳐진 산책로와 다소곳이 떠 있는 작은 등대, 곳곳에 내걸린 시화는 어디선가 클래식 선율이 울려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2007년부터 매주 토요일에는 ‘마량놀토수산시장’이 열리고 있다. 3월부터 11월까지 개최되는 놀토수산시장은 올해에만 벌써 25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매주 토요일은 마량껏 즐기자!”라는 구호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올해 달라진 점은 기존의 토요음악회를 가수 중심의 공연에서 벗어나 마술, 벨리댄스, 인디밴드 공연으로 영역을 다변화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년 항구 앞 바다에 통유리로 된 북카페가 개장되면 새로운 명소로 부상할 전망이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일찍이 우리나라는 항구를 거점으로 문화가 번성했다. 물산의 운반과 사람의 이동, 문화의 교류가 항구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양상은 바다가 지닌 본질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인 수용성과 맞물려 문화의 융합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일찍이 강진은 문화유산답사 1번지로 알려진 고장이다. 유홍준 교수가 지난 1993년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답사 1번지로 규정하면서, 강진은 전국적인 문화관광 도시로 발돋움했다. 영암과 장흥, 해남으로 둘러싸인 데다 중앙으로 강진만이 깊숙이 만입한 지형은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천혜의 요건으로 부족함이 없다.
유려한 문체로 풀어낸 탐진만의 모습은 자못 아름답고도 신비롭다. 작가의 비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강진의 문화가 강진 바다와 탐진강을 배경으로 피어났기 때문이다. 고려청자 도요지, 가우도, 다산초당, 영랑생가, 전라병영성과 하멜 표류지, 무위사와 백련사 등…. 고을 곳곳에 산재한 유서 깊은 문화와 유적은 왜 강진이 남도의 문화답사1번지인지, 왜 한국의 문화답사1번지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강진에서도 가장 ‘강진스러운’ 곳은 아마도 ‘남도의 나폴리’로 알려진 마량항(馬良港)일 것 같다. 마량은 조선시대 제주에서 싣고 온 말이 집결되는 항구다. 근동에 원마(元馬)와 숙마(宿馬), 신마(新馬) 등 말을 매개로 한 마을 이름이 많은 건 그 때문이다.
부두를 걷다보면 한때 이곳을 드나들던 어선들의 뱃고동소리와 말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량항에서 보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입체적인 시간의 변동이다.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닌 서로 상관하면서 굽이치는, 문화와 역사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강진사람들의 삶의 현장이다.
강진이 청자(靑瓷) 고장으로 불리게 된 데는 마량항으로 대변되는 해상로를 배후로 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고려청자의 90%가 강진에서 출토됐다. 강진이 가히 ‘문화의 보고’, ‘문화의 자궁’으로 불리게 된 근거는 이 마량항 때문이다.
강진의 도자기는 강진만의 넉넉한 바다와 풍요로운 햇살, 싱그러운 바람이 빚었다. 여인의 품처럼 넉넉하고 찰진 토질에서 청자와 도자기가 배태되었고, 이 흙속에서 풀과 꽃과 무수한 생명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마량항은 이처럼 문화를 견인하는 유서 깊은 항구로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수산물을 실어 나르는 운송지가 아닌, 문물이 교류되고 다양한 기능이 작동하는 문화 항구로서 말이다.
마량항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 다기능어항 시범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서부터다. 1984년 기본 계획이 수립돼 개발이 진행돼오다 2005년 본격적으로 다기능 어항 공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2006년 수변테크, 야외 공연장, 산책로 등의 시설이 새롭게 설치되고 친수·관광시설이 추가됨으로써 휴식·휴양의 공간으로 일대 변신을 이룬다.
예상은 적중했다. 천혜의 자연 환경에 친수시절과 문화공간이 갖춰지자 “역시 미항”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방파제를 따라 펼쳐진 산책로와 다소곳이 떠 있는 작은 등대, 곳곳에 내걸린 시화는 어디선가 클래식 선율이 울려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2007년부터 매주 토요일에는 ‘마량놀토수산시장’이 열리고 있다. 3월부터 11월까지 개최되는 놀토수산시장은 올해에만 벌써 25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매주 토요일은 마량껏 즐기자!”라는 구호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올해 달라진 점은 기존의 토요음악회를 가수 중심의 공연에서 벗어나 마술, 벨리댄스, 인디밴드 공연으로 영역을 다변화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년 항구 앞 바다에 통유리로 된 북카페가 개장되면 새로운 명소로 부상할 전망이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