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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최 영 태
전남대 사학과 교수
2016년 10월 12일(수) 00:00
1949년부터 1969년까지 서독을 이끈 기민련 정부는 동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동독을 봉쇄하여 흡수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969년 집권한 사민당 출신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동독을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했다. 그는 가능하지 않은 통일을 이야기하고 동독을 붕괴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상호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현실적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산가족들이 재회하고 교류하도록 하는 것이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는 최소한의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독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여 동독인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은 같은 민족으로서 행해야 할 기본 도리라고 주장했다. 브란트는 이런 방식으로 평화공존하면서 함께 더불어 산다면, 그리하여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한다면 절반의 통일은 실제로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야당인 기민련·기사련과 보수 언론에 의해 집요하게 공격받았다. 야당은 197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브란트를 불신임투표에 회부하였고 그는 겨우 2표 차이로 구제받았다. 동서독간의 기본조약이 체결되자 야당은 의회에서 비준해주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사민당과 그 연정파트너인 민주당 의원만으로 기본조약을 통과시켰다.

1972년 재선에 성공한 브란트는, 그러나 1974년 동독 스파이 사건으로 다시 한 번 시련을 맞는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큰 혜택을 보았던 동독이 브란트 주변(비서)에 스파이를 심어두었는데 그게 드러난 것이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야당과 보수언론은 일제히 브란트와 동방정책을 조롱하면서 그의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브란트는 1974년 임기 2년을 남겨두고 중도사퇴하고 만다. 만신창이가 된 그는 한 때 자살까지 결심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브란트의 상처로 끝났을 뿐, 동방정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의 후임자인 헬무트 쉬미트(Helmut Schmidt)에 의해 8년 동안, 그리고 1982년 정권을 잡은 경쟁자 기민련의 헬무트 콜(Helmut Kohl)에 의해 8년 동안 계속 동서독 화해정책이 추진되었다. 서독 정치인들의 성숙함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1990년의 독일 통일은 바로 20여 년 동안 지속된 동서독 화해정책과 동구 공산권의 몰락, 서독의 국력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브란트가 1990년 독일 통일과 함께 1974년의 불명예를 깨끗이 씻고 명예회복을 한 것은 물론이었다.

동방정책의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타고, 또 그 동방정책 때문에 큰 시련을 겪었던 브란트를 생각할 때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햇볕정책이 생각난다. 특히 남북이 대결의 농도를 짙게 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 시점에서 더욱 간절하게 브란트와 DJ가 생각난다.

박정희가 1973년 DJ를 동경에서 납치해 죽이려 했을 때, 전두환과 신군부가 1980년 DJ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때 내세운 대표적인 죄목은 연방제론을 필두로 한 그의 진보적 통일관이었다. 그러나 DJ는 이런 수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1988년 ‘공화국 연방제 통일의 길’이라는 글을 썼고,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5년에는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을 출간했다. 국민이 인정하지 않으면 역사가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해 줄 것이라는 신념이 그를 이렇게 용기 있게 만든것 같다.

민주평화세력의 중심 정당이라고 자처하는 제일야당 민주당은 한반도 긴장의 주요 사안 중 하나인 사드배치에 대해 지금도 모호한 입장을 취하며 이 눈치 저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주요 이유가 내년 대선에서의 표계산 때문이라고 한다. 다행히 국민의당과 정의당이 사드문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이들은 힘이 약하다. 또 언제까지 이 주장을 지속시킬지 알 수 없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남북화해와 평화정책은 DJ처럼 민족문제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목숨을 건 도전이 없이는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인 것 같다. 브란트의 논리처럼 남북화해와 공존을 통한 민족 동질성만 유지해도 절반의 통일은 이루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이렇게 평화공존이 어렵고 또 죽기 살기로 싸우는지 모르겠다. 통일을 이룰 능력과 방안도 없으면서 걸핏하면 통일 운운하며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들이 역겹게 느껴진다. 제2의 DJ가 나오고, 남북이 합심하여 절반의 통일이라도 이루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