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현의 문화카페] 아! 오지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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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현의 문화카페] 아! 오지호 화백
2016년 02월 17일(수) 00:00
‘박진현의 문화카페’가 처음 독자들과 만난 건 지난 2006년 9월 4일이었다. 당시 광주는 2004년 첫 삽을 뜬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의 성공적 개관을 바라는 기대감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예향의 현주소와 미래를 짚어보는 세미나들이 하루걸러 이어졌다. 매주 한 번씩 문화카페를 ‘열게’ 된 것도 지역의 문화이슈들을 함께 고민하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날’ 문화카페의 첫 주인공은 ‘오지호 초가’였다. 한국적 인상주의 회화를 개척한 고 오지호 화백(1905∼1982)의 예술혼이 깃들어 있는 광주 지산동 초가(광주시 기념물 제6호)를 둘러싼 인근 주민들의 갈등을 꼬집는 글이었다. 그즈음 일부 주민들이 1986년 오지호 초가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20년 동안 건물 증축제한과 같은 재산침해를 겪어 왔다며 광주시에 지정해제를 요구한 것이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기자는 1년 전(2005년), 오 화백의 둘째아들 오승윤 선생(1939∼2006년)과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산동 초가를 ‘애물단지’로 여기던 일부 주민들이 광주시에 민원을 넣는 등 분위기가 뒤숭숭했었다. 기자는 초가에서 거주하는 유족의 입장을 듣고 싶어 오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심 주민들의 ‘집단행동’에 못마땅해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런데 웬걸, 선생의 반응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우리도 하루빨리 해제됐으면 좋겠다. 이젠 기나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 저 세상에서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더라도 주민들의 원성을 사면서까지 ‘구차하게’ 문화재로 남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이런 에피소드를 곁들여 쓴 ‘오지호 초가’는 거장에 대한 예우와 그의 예술자산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다행히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만큼 기념물 해제는 있을 수 없다”는 광주시의 방침으로 오지호 초가 논란은 마무리됐다.

흔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 광주의 ‘예술인 마케팅’을 들여다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얼마 전 ‘사람이 문화자산이다-오지호 화백’(본보 2월 3일자 18면)을 취재한 후배기자에 따르면 2016년 겨울에 찾은 지산동 초가는 10년 전 그대로였다고 한다, 유품은 있지만 유작은 없고 광주의 명소들과 연계된 관광마케팅이 부족해 방문객이 뜸하기 때문이다.

사실 서양화단의 개척자인 오 화백의 작품을 광주에서 접하는 건 쉽지 않다. 대부분의 대표작이 국립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데다 광주시립미술관 내 오지호 전시실이 지난 2008년 폐쇄되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관람할 상설공간이 거의 없다. 출생지인 화순 모후산 자락에 ‘오지호 기념관’이 있긴 하나 진품은 1점뿐인 ‘무늬만 기념관’이다.

시인 이성부는 “광주에 가면 /크고 작은 세상일 굽어 보며/든든하게 버티고 앉아 있는 사람/(중략) 광주에 가서/서울 닮지 않은 광주를 만나고 싶은 자/무등을 등에 업은/지산동 골짜기 초가집을 찾거라’(시 ‘광주에 가서’)고 했다. 언제쯤이면 외지인들에게 ‘오지호’라는 근사한 브랜드를 보여주게 될지 참….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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