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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홀리데이(Holiday)
홍 행 기
경제부장
2014년 08월 06일(수) 00:00
서울올림픽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미결수 25명 중 12명이 호송차를 탈취·도주하는 탈주극이 벌어졌다. 이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잡히지 않았던 4명은 서울에서 무려 8일 동안이나 경찰의 검문을 피해다녔다.

이들은 10월 15일 밤 9시40분께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 모씨의 집에 숨어들어 고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를 시작했다. 이른바 ‘지강헌(池康憲) 사건’이다. 한밤의 인질극은, 지강헌(당시 35세) 일당에게 붙잡혀있던 고 씨가 이튿날인 16일 새벽 4시께 탈출해 인근 파출소에 신고하고, 곧바로 경찰 1000여 명이 집을 포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TV 화면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다시피 했던 인질극은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일당 중 강영일(당시 21세)이 경찰과 협상하러 집 밖으로 나가있을 때 또 다른 일당인 한의철(당시 20세)과 안광술(22세)은 지강헌이 지니고 있던 총으로 자살했다. 이 총은 호송 교도관으로부터 빼앗은 것이었다.

마지막을 예감한 지강헌은 경찰에게 그룹 비지스(The BeeGees)의 노래 ‘홀리데이’(Holiday) 테이프를 가져다 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이 가져다준 테이프를 크게 틀어둔 채 창문을 깨뜨린 그는 깨어진 유리조각을 주워 자신의 목을 그었다.

인질을 해치려는 걸로 착각한 경찰 특공대가 쏜 총탄이 지강헌의 꺼져가는 목숨을 거둬갔다. 살아남은 강영일이 생포되고, 인질로 잡혀있던 가족이 모두 무사히 구출되면서 피로 얼룩진 인질극은 막을 내렸다.

26년 전 사건을 이제와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어지는 상대적 불평등’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당시 지강헌 일당이 인질들에게 밝힌 탈주 원인은 10∼20년에 이르는 ‘과중하고 불평등한’ 형량이었다.

범죄자의 시각에서 편의대로 생각한 것이지만, 그때는 이른바 ‘5공 비리’로 불리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 일가의 부정부패로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심화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

지강헌은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는 것이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라고 항변했다. 범죄자의 치졸한 변명이자 궤변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일반인들의 상식에 비춰볼 때’ 우리 사법체계가 이 같은 비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얼마 전 세간에서는 유명 로펌 소속 전관(前官) 변호사가 받은 성공보수금이 화제가 됐다. 재판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계약조건은 착수금 3000만 원, 그리고 성공보수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나 법원의 무죄 선고 시 2억 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변호를 의뢰한 당사자는 1∼3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반면, 함께 법정에 섰던 공동 피고인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무죄를 선고받은 의뢰인이 ‘성공보수가 과다하다.’라며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는 후일담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거금을 들여 무죄를 산 것 아닌가?’라는 일반인의 시선이다. 혼자만 무죄를 받았을 뿐, 공동피고인들은 유죄라는 점도 이 같은 시각에 일부나마 타당성을 부여한다. 변호사가 노력을 했고, 법원도 합리적 판단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을 터이지만 변호에 거금을 요구하고, 또 기꺼이 지급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물론, 우리 이웃에는 서민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리는 판사와 검사, 그리고 무료 변론에 앞장서는 변호사도 무수히 존재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과다한 성공보수가 사회적 통합을 해치고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정치가 불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지금, 사법체계야말로 국민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제2, 제3의 지강헌이 나오지 않도록 사회적 소통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redplane@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