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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기록문화
강 대 석
남도향토문학연구원장·행정학박사
2014년 08월 06일(수) 00:00
조선 기록문화의 우수성은 세계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 중의 백미는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부터 제25대 철종 때까지(1392년∼1863년) 무려 472년간에 걸친 장구한 기록이다. 그 내용과 보존 면에서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보존 과정을 보면 선조들의 노력과 지혜가 실로 놀랍다. 사관은 오직 기록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왕의 언행과 사생활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어느 경우엔 왕이 기록하지 말라고 명한 내용까지도 기록하는 솔직함과 대담함을 보였다. 실례로 태종4년 2월8일 기록에 의하면, 왕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사관은 그 말까지도 기록하였다.

보존에 있어서도 그 노력은 대단했다. 처음 편찬할 때부터 재해와 전란 등에 대비하여 4부를 만들어 서울, 충주, 성주, 전주에 사고를 짓고 분산 보관 했다. 임진왜란으로 전주를 제외한 3곳의 사고가 소실되자 다시 4부를 더 만들어 5부를 오대산과 태백산, 묘향산(후에 적상산으로 이관), 정족산, 춘추관에 분산 보관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또한 실록을 원형대로 영구 보존키 위해 매 3년마다 한 번씩 포쇄(햇볕에 말리는 작업)를 하여 습기와 해충을 예방하였으며, 이때에도 반드시 왕명을 받은 사관이 사고의 문을 열고 작업을 감독하는 등 실록의 관리가 매우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기록에는 항상 공정성과 객관성, 진실성이 요구된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런 면에서 볼 때 더욱 대단하다. 사관들은 기록을 함에 있어 진실성이 담기도록 최선을 다하였으며, 편찬에 있어서도 공정성과 객관성이 유지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조선중기로 내려오면서 당쟁이 격화되자 편찬을 맡은 관리들도 사람인지라 정파에 따라 편찬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 선조실록의 경우 광해군 때 북인들의 주도로 편찬되다보니 서인의 영수였던 율곡 이이의 죽음에 대하여 ‘이조판서 이이 졸’이라고 단 7자로 정리할 만큼 반대편에 인색했다. 나중에 서인들이 집권 후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율곡 이이에 대한 기록이 916자로 늘어나는 등 서인의 시각에서 수정 편찬된다.

그러한 예는 남인들이 집권한 시기에 편찬된 현종실록도 마찬가지다. 숙종 때 서인들이 집권 후 ‘현종개수실록’을 편찬하여 보완하였고, 영조 때 소론이 편찬한 경종실록 역시 후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경종수정실록’으로 수정 편찬 되었다. 또한 숙종실록의 경우에도 소론과 노론의 당쟁과정에서 요즘의 정오표라 할 수 있는 ‘보궐정오’를 편찬 보완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원본을 없애지 않고 함께 보존하는 아량과 지혜를 보여주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서 문득 요즈음은 중앙은 물론 지방정부에서도 기록문화에 소홀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물론 영구보존문서를 비롯한 주요 문서들은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하여 보존한다지만 정작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쉬운 것들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시대상이 베인 시정일기와 같은 자료들일 것이다.

이제 민선 6기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라도 각 지자체에서는 실록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정일기(施政日記)를 써 보면 어떨까? 가령 단체장의 하루 일정과 각 부서에서 제출되는 보고전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당일의 회의내용이나 지시사항 등을 곁들여 일기를 쓴다면 매우 흥미롭고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정일기가 체계적으로 기록 보존된다면 먼 훗날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큰 가치를 지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