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와 벽돌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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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와 벽돌공장
류 동 훈
행복문화사업단 단장
2014년 07월 30일(수) 00:00
고흥 소록도(小鹿島). 위에서 보면 작은 아기사슴을 닮았다 하여 작을 소, 사슴록 자를 넣어서 소록도라 불리운다. 고흥은 필자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소록도가 섬이어서 그저 녹동항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직접 가보지 못한 채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받는 곳이라는 말만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소록대교도 놓여있고, 근처 금산 거금도 섬까지 거금대교까지 개통되어 멋진 해안선을 따라 바로 차로 쉽게 소록도를 갈 수 있다. 그래서, 며칠 전 농촌체험 답사를 위해 소록도를 사십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가 보고는 많은 감동과 느낌을 받았다.

소록도 공원으로 가는 길은 해안가를 따라 가는 산책로로 평온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공원에 들어서면 시민들의 십시일반 성금인 ‘크라우드펀딩’방식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 벽화도 보였다. 일제시대 때 한센병 환자들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공원이 펼쳐지고, 여기저기 붉은 벽돌 건물들이 서 있었다.

한참을 돌아보다 순간 나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연못 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이 고통스럽게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인 1933년에 제4대 원장으로 부임한 일본인 수호 원장은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벽돌공장을 만들어 연간 140만 장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완성하였다. 몸이 불편한 원생들에게 벽돌공장에서 임금을 주는 일자리도 제공하여 처음에는 무난하게 출발하였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소록도 벽돌공장에서는 매일 수만 장의 벽돌을 만들어 판매를 하는 강제노역이 시작되었고, 인건비도 대폭 삭감한 채 노동착취를 하였다.

대량으로 많은 양을 빨리 찍어내기 위해 미처 식지도 않은 뜨거운 벽돌을 가마에서 꺼내다 감각이 없는 손들이 화상을 입어 병상이 더 악화되기도 했다. 반항하는 사람들은 그 벽돌로 지은 감금소에 가두고, 폭행하였으며 심지어 단종(斷種)시술까지 행했다. 도망가기 위해 소록도 앞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쳐 가다 죽기도 하고, 또 발견되면 배에서 죽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연간 6000kg의 송진을 채취하고 연간 30만 장의 가마니를 생산하고, 토끼가죽과 3만 포의 숯을 생산하는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나중에 수호 원장은 자신의 동상까지 세워 강제로 참배하게 하였지만, 참배식 때 원생 이춘상의 칼에 맞아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바로 그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들어선 것이다.

처음에는 좋은 취지로 시작했던 일이라 하더라도 주변의 상황과 역사적 상황이 목적을 달리 만들었다. 사업을 추진하는 사람의 동상까지 세우는 욕심은 결국 많은 사람을 고통 속에 신음하게 하였고, 본인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지금 오늘 우리 주변에 소록도의 벽돌공장 같이 당초 목적이 바뀌어 오히려 고난이 되고 있는 사례는 없는지 살펴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인 대안과 실천을 내 놓아 잘못된 역사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록도 앞 바다와 정원은 슬픔과 편견을 극복해 내는 역사적 교훈이 있는 장소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한다. 좋은 취지로 만든 시설이라 하더라도 운영을 잘못하면 예산을 낭비하는 애물단지가 되고, 지역을 살리는 행사라고 해서 유치를 하지만 운영과정에 치밀하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참석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례도 있다.

과도한 성과 위주의 사업 추진 보다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의 행복과 본래 취지를 항상 생각하면서 사업들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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