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서방사거리에는 서방이 없다 - 박용수 동신여고 교사, 화순문학 편집장
2026년 03월 09일(월) 07:20
서방사거리는 전국적 지명이다. 지금과 달리, 충장로 금남로와 쌍벽을 이루는 광주 최고 중심지였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교육기관이다. 전남대, 광주교대, 동강대, 동신중고, 동신여중고, 광주고, 광주상고와 광주여상, 광주농고까지 광주 주요 대학과 명문 고등학교가 몰려있었다. 게다가 2부제 수업까지 했으니,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골에서 공부 깨나 한 학생들로 하숙방 자취방을 구하기 어려웠다.

누나는 호남전기에 다니고 동생은 공부했거나, 손주가 학교 다니게 되어 밥을 해주려고 할머니가 따라온 경우도 많았다. 1970~80년대는 노무현이나 이재명처럼 오직 희망 하나 가지고 서방으로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아침이면 샘터에 남녀, 형, 누나 가리지 않고 세수하고 양치질했다. 등하굣길은 손잡이에 매달린 버스 안내양에 떠밀려 만원 시내버스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하교해서 밤늦게 작두펌프로 물을 퍼서 빨래하고 있으면 옆집 여학생도 빨래를 가지고 나와 슬며시 내 빨래를 가져가서 해주었다. 난 그 여고생과 사직공원에 가서 호빵을 사 먹기도 했다.

서방사거리 바로 옆 ‘푸른 길’은 그땐 자주 기차가 다녔다. 기차가 오면 ‘땡땡땡’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간수(看守)가 뛰어나와 차단기를 내리고 좌우를 살폈다.

백림약국, 서방시장, 구호전, 광주역 그리고 100m도 되지 않는 계림동에 시청(1969~2004년)이 모두 서방사거리를 중심으로 실핏줄처럼 이어졌다. 서방을 거치지 않고 어디도 갈 수 없었다. 구호전 골목에는 숙소가 많은 유흥가였다. 낮에는 시청을 찾은 사람들이, 밤이면 어깨들이 화려한 불빛 아래로 모여들었다.

방은 벽 하나를 사이로 더덕더덕 붙어있어서 밤엔 벽 너머로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렸다. 간혹 부엌을 여럿이 쓰기도 했는데 각기 밥은 따로 했지만 찬은 서로 나누어 먹기도 했고, 좀 친해지면 이집 저집 불러서 함께 밥을 먹으며 절로 식구가 되었다.

토요일이면 농사일을 도와주려고 해남이고 장흥이고 고향으로 갔지만 실제로는 반찬을 가지러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시골에 다녀온 일요일 오후는 모두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어머니는 꼭 주인아주머니께 전해달라며 양파, 고구마, 옥수수 따위를 따로 준비해서 전해주셨는데 그게 주인집과 오래도록 연을 맺기도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또래 친구가 있어서 방학이면 우리 집에서 며칠째 살기도 했고, 5·18 때는 주인집 할머니를 따라 녹동 마을 뒤 숯을 굽던 ‘다닭실’ 에 숨기도 했다.

앞집에도 친구가 자취했는데 놀러 가면 주인댁 따님이 무척 반겼다. 그 처자를 따라 몇 차례 계림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손이 따뜻했다. 밤이면 “뻔~, 뻔~” 하고 번데기 장사가 외쳤는데 그 처자는 저 아저씨는 아마 “데기, 데기” 하며 잠꼬대할 거라며 웃겼다.

예전 광주는 커다란 도넛 형태로 송정, 대촌, 서창, 동곡, 임곡, 극락, 비아, 하남, 서방, 석곡, 지산, 효지면이라는 광산군(光山郡)에 둘러싸여 있었다. 경양 호수를 메워 만든 구시청 주변 서양면(瑞陽面)과 두암동 문흥동 일대 두방면(斗坊面)을 행정 통합하면서 1914년 서방면(瑞坊面)이 되었다가 1955년 7월 석곡 극락 효지면과 함께 광주시로 편입되었다. 북구(北區)) 대부분이 서방이었는데 풍향동 계림동 중흥동 중심인 지금 서방사거리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서방시장 임대료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상인들이 우산동으로 이주하면서 지금 ‘말바우시장’이 형성될 정도로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한 곳이다.

서방 없는 서방사거리, 그러나 짯짯이 들여다보면 여전히 서방시장이 있고 의병장 조경환, 독립투사 양순희 그리고 소설가 한강도 이곳 출신이다. 또 주먹 김태촌과 가수 이영숙 사이의 생사를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도 남아 있다. 당시 ‘그림자’ 노랫말처럼 쓸쓸했던 시대, 수많은 이들이 희망을 품고 살았던 곳이 서방 주변이다.

지금은 서방시장도 구호전도, 시청도 없다. 게다가 기찻길도 없고 유은학원까지 떠났으니 그야말로 서방은 서방이 아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고려의 도읍지 개경 이야기만도 아닌 듯싶다.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773008400796383323
프린트 시간 : 2026년 03월 10일 07: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