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은혜, 부채감보다 사랑으로 - 최현열 광주 온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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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EBS 프로그램 ‘인생이야기 파란만장’에서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사연이 하나 소개되었다. 2002년 김해 민항기 추락 사고 당시, 아수라장이 된 기내에서 자신의 사장을 포함해 20여명을 구출해낸 영웅 설익수 씨의 이야기다. 목숨을 빚진 사장은 처음엔 고마워하는듯했으나 정작 설씨가 사고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힘들어하자 태도가 돌변하였다. 보상은커녕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퇴사하라”며 은인을 내쫓은 것이다.
인간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거대한 은혜를 입으면 상대방을 볼 때마다 자신의 무력함과 채무 상태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게 된다. 결국 사장은 감사라는 도덕적 반응 대신 부채의 증거인 은인을 눈앞에서 제거함으로써 심리적 자유를 얻으려는 비겁한 선택을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인간적 본성은 종종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교묘하게 이용되기도 한다. 일부 목회자와 공동체는 십자가의 희생을 성도들의 양심을 압박하는 영적 부채로 둔갑시킨다. “주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는데 겨우 이것밖에 못 하느냐”는 식의 가르침은 성도들에게 끊임없는 부채감을 주입하여 헌신을 강요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다. 은혜를 갚아야 할 빚으로 규정하는 순간 복음은 성도를 옭아매는 통제 수단이 되고 신앙은 기쁨 없는 부채 상환의 노동으로 전락한다. 공포와 죄책감으로 세워진 신앙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랑에 이를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채무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필자는 최근 아파트를 구입하며 30년 상환의 매우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았다. 분명 갚아야 할 채무의 의무는 존재하지만 그 조건이 워낙 파격적이고 감당 가능하기에 삶의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대출 덕분에 내 집이라는 안식처를 얻고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도 이와 같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이자를 요구하는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를 파산시키려는 빚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 시민권을 얻고 평안히 거할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신 가장 낮은 이율의 사랑이다. 의무는 사랑에 대한 자발적 반응으로 남되 그 무게가 인간을 짓누르지 않게 하신 것이 바로 복음의 신비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결코 부채감을 이용해 인간을 조종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빚 독촉장을 내밀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지고 있던 죄와 사망의 무거운 고금리 빚을 대신 갚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우리를 빚진 종으로 부리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거저 누리는 자녀로 세우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로마서 8:15)는 말씀처럼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통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억압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키는 완전한 자유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갚으라고 독촉하지 않으시며 그저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초대하실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인간을 죄책감의 감옥에 가두는 쇠사슬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생명의 호흡이다. 참된 헌신은 빚을 갚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가”라는 자각에서 흘러나오는 감사한 반응이어야 한다. 이번 사순절, 우리를 억눌러온 모든 영적 가스라이팅과 채무 증서를 주님 앞에 내려놓기를 소망한다. 낮은 금리의 대출이 거주 권리를 보장하듯 주님의 사랑은 우리 영혼에 영원하고도 안전한 안식처를 제공한다.
십자가는 평생 갚아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쉴 수 있는 사랑의 품이다. 갚을 수 없는 은혜 앞에 죄책감 없이 당당히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사신 자녀의 권세다. 이번 사순절에는 “무엇을 더 해드려야 할까”라는 불안 대신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구나”라는 평안에 잠겨보기를 권한다. 그 사랑의 품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채무자가 아닌 사랑받는 자녀로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인간적 본성은 종종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교묘하게 이용되기도 한다. 일부 목회자와 공동체는 십자가의 희생을 성도들의 양심을 압박하는 영적 부채로 둔갑시킨다. “주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는데 겨우 이것밖에 못 하느냐”는 식의 가르침은 성도들에게 끊임없는 부채감을 주입하여 헌신을 강요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다. 은혜를 갚아야 할 빚으로 규정하는 순간 복음은 성도를 옭아매는 통제 수단이 되고 신앙은 기쁨 없는 부채 상환의 노동으로 전락한다. 공포와 죄책감으로 세워진 신앙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랑에 이를 수 없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결코 부채감을 이용해 인간을 조종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빚 독촉장을 내밀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지고 있던 죄와 사망의 무거운 고금리 빚을 대신 갚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우리를 빚진 종으로 부리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거저 누리는 자녀로 세우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로마서 8:15)는 말씀처럼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통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억압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키는 완전한 자유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갚으라고 독촉하지 않으시며 그저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초대하실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인간을 죄책감의 감옥에 가두는 쇠사슬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생명의 호흡이다. 참된 헌신은 빚을 갚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가”라는 자각에서 흘러나오는 감사한 반응이어야 한다. 이번 사순절, 우리를 억눌러온 모든 영적 가스라이팅과 채무 증서를 주님 앞에 내려놓기를 소망한다. 낮은 금리의 대출이 거주 권리를 보장하듯 주님의 사랑은 우리 영혼에 영원하고도 안전한 안식처를 제공한다.
십자가는 평생 갚아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쉴 수 있는 사랑의 품이다. 갚을 수 없는 은혜 앞에 죄책감 없이 당당히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사신 자녀의 권세다. 이번 사순절에는 “무엇을 더 해드려야 할까”라는 불안 대신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구나”라는 평안에 잠겨보기를 권한다. 그 사랑의 품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채무자가 아닌 사랑받는 자녀로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