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의 ‘여백서원에서]’ 궁극의 지혜, 눈 먼 자의 지혜
2026년 02월 12일(목) 00:20
Faustㅡ주먹. 60년을 쏟아부어 쓴 심각한 대하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이 왜 하필 ‘주먹’일까. 더구나 그는, 그야말로 ‘주먹 권’이 횡행하던 어두운 시대, 중세에 4대 학문인 법학, 의학, 철학, 신학을 다 섭렵하고도 회의로 독배를 드는 큰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캐릭터 자체는 인형극이나 민중본, 혹은 유랑 극단의 공연으로 오래 있어온 이야기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 속 파우스트는 기독교 일색의 사회에서 불경하게도 영혼을 팔아서 24년간 지상에서 온갖 복락을 다 누리고, 시한이 차자 마땅하게끔 지옥에 떨어졌다는 문제적 인간이다.(기독교권의 권선징악의 이야기인 것.)

그 단순한 이야기를 괴테는 장려한 휴먼드라마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시한을 제거해 놓고 60년을 쏟음로써이다. ‘24년간 온갖 복락을 누리고’에서 24년을 빼버리고 내기로 만들었다. 파우스트가 악마가 제공하는 향락에 마침내 만족하여,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도 만족하여, 그 순간을 향하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면 그때 영혼을 가져가기로 함으로써 말이다.(그렇게 지옥에 떨어진 파우스트는 악마의 종살이를 해야 한다.)

계약을 내기로 바꾼 그 하나의 전환이 ‘파우스트’라는 근대인의 대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추동력이 된다. “세계를 그 가장 내면에서 지탱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고 싶고, “하늘에서는 가장 밝은 별을, 땅에서는 모든 최고의 쾌락을” 다 원하는 인간, 파우스트는 끝없이 욕망에 추동될 뿐 좀처럼 계약의 말을 입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작품 ‘파우스트’는 3000년의 시공을 누비는 이야기가 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1만2111행의 시구가 된다.

평생 쓰고도 모자라 죽음 직전까지 교정을 거듭한 원고를 “이해받지 못하리라”고 괴테는 봉인해서 넣고 죽지만, 사후 출간된 ‘파우스트’는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현대에 와서는 더더욱 시사성이 높아지는 작품이 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욕망에 휘둘리며 사는가. 설령 모든 걸 다 바라도 되는 기회가 주어져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단 한 번 밖에 못 하고 떠나야 하는 그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같은 말을 쉽사리 입밖에 내기에는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게 너무 많다. 하여 이야기는 길고 길어지고 파우스트의 체험역은 천지간을 아우르게 된 것이다.

그 3000년을 뒤따라 가보기는 읽는 이도 숨이 가쁘지만 그런 ‘내달림’도 언젠가는 멈추어야 하는 법. 그 멈춤의 설정 또한 신묘하다. 이제 모든 것을 가져서 그의 집에는 악귀조차 범접을 못하는 100세의 파우스트 집 열쇠 구멍으로 스며드는 것이 있다. 근심이다. 근심이 말한다. “인간은 평생토록 맹목이니” 즉 눈 뜨고 눈 멀어 사니, 이제 “종국에 너 눈 멀라”며 근심이 입김을 불어 파우스트는 장님이 된다. 평생토록 멀쩡히 눈 뜨고 눈 먼 사람처럼 내달려온 파우스트에게서 눈이 멀자 비로소 마음의 눈이, 심안이 떠진다.

해안을 메우는 개간의 삽질 소리를 들으며 (실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삽질 소리를 들으며), 남녀노소가 새로 생길 낙토며 거기 모여 살 공동체를 그려보며 파우스트는 그 계약을 입 밖에 낸다.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드디어 그 말이 나왔으므로 메피스토펠레스는 쾌재를 부르지만, 파우스트의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대신 어딘가 높은 곳을 향하는 것으로 작품이 끝난다. 계약의 말이 나오긴 했어도 그건 악마가 제공한 것이 흡족하여 나온 말이 아니다. 그 말이 나온 건, 참으로 오래 허겁지겁 욕망을 뒤쫓으며 방황하던 한 인간이 마침내ㅡ눈 멀었기에ㅡ밝아진 눈으로 ‘함께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깨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이름이 하고 많은 이름 중에서 ‘주먹’이라니. 뜻을 떠올릴 때마다 좀 우습고 아이러니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세계의 근본을 알고 싶어하는 도저한 열정, 맹목적 내달림이었던 삶, 그러나 우격다짐으로 내닫기만 했던 그에게서 마침내 문득 밝아오는 지혜ㅡ. 그런 모든 치열함이 이 가벼운 아이러니 속에 포섭되는 것도 같아 재미있다. 괴테 자신은 대작 파우스트를 “진지한 농담”이라 불렀다. 진지함의 무게를 조금 덜어 볼 생각이었을 게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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