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 ‘자연이 전하는 말’] 사라지는 것은 종이 아니라 관계다
2026년 01월 22일(목) 00:20
올해는 병오년, 붉은 말의 해다. 이를 맞아 기후에너지환경부는 1월 ‘이달의 멸종위기 야생생물’로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인 붉은발말똥게를 선정했다. 말의 해에 말똥게라니…. 이름만 들으면 잠시 웃음이 나온다. 왜 하필 지금, 이 생물일까?

붉은발말똥게는 크지 않다. 갑각의 폭은 3~4센티미터 남짓. 성인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면 허전할 정도다. 몸은 회갈색이나 푸른빛을 띠고 다리는 이름처럼 선명한 붉은색을 띤다. 썰물 때 갯벌 위를 오가는 모습은 비교적 눈에 띄지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갯벌 속 굴에서 보낸다. 조간대 갯벌에 굴을 파고 살며 물이 빠질 때에만 밖으로 나와 활동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서해안과 남해안의 갯벌, 특히 전남과 충남 일대의 비교적 넓고 완만한 갯벌에서 발견된다. 한때는 흔한 생물이었지만 간척과 매립, 갯벌 단절이 이어지면서 서식지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름에 들어간 ‘말똥’은 종종 오해를 부른다. 붉은발말똥게가 실제로 말똥을 먹기 때문은 아니다.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갯벌 표면의 퇴적물을 먹고 난 뒤 남기는 둥근 배설물의 모양이 말똥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이 게가 말똥과 비슷한 냄새를 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는 죽은 물고기나 곤충, 떨어진 나뭇잎처럼 유기물이 섞인 흙을 먹는 습성에서 비롯된 추정에 가깝다. 이름은 다소 거칠게 들리지만 그 안에는 이 생물의 생태적 특징이 그대로 담겨 있다.

붉은발말똥게는 갯벌을 더럽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갯벌을 살아 있게 만드는 생물이다. 이들은 낙엽과 유기물이 섞인 퇴적물을 섭취한 뒤 미생물이 분해하기 쉬운 형태로 다시 배출한다. 하루 동안 자신의 체중에 맞먹는 퇴적물을 처리한다. 생태학에서는 이런 작용을 ‘생물교란’이라 부른다. 말똥게가 갯벌을 끊임없이 뒤집어 주기 때문에 산소가 퇴적층 깊숙이 스며들고 황화수소 같은 유해 물질이 쌓이지 않는다.

실제로 말똥게류가 사라진 갯벌에서는 퇴적층이 단단히 굳고 저서생물의 종수와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이 관찰된다. 겉으로는 여전히 갯벌처럼 보이지만 내부의 기능은 이미 멈춰 있는 셈이다. 붉은발말똥게는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갯벌의 물리적·화학적 환경을 유지하는 기능적 핵심종에 가깝다.

갯벌은 단순한 진흙 땅이 아니다. 육지에서 흘러온 영양분과 바다의 에너지가 만나는 경계이며 수많은 생물이 관계를 맺는 공간이다. 붉은발말똥게가 유기물을 처리하면 미생물이 늘고, 미생물이 늘면 작은 저서생물이 살아난다. 그 생물들을 먹기 위해 철새가 찾아오고, 그 흔적은 다시 갯벌로 돌아온다. 붉은발말똥게 한 종을 설명하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갯벌 전체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게 된다. 이 생물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붉은발말똥게가 사라진다는 말은 단순히 한 종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갯벌에서 더 이상 순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멸종은 늘 이렇게 시작된다. 눈에 잘 띄는 종이 아니라 관계를 잇는 작은 존재부터 사라진다. 우리는 그 변화를 뒤늦게 ‘종의 위기’라고 부르지만, 먼저 무너진 것은 관계다.

인간은 종을 보호한다면서 보호구역을 만들고 목록을 작성한다. 그러나 자연에서 중요한 것은 목록보다 연결이다. 갯벌을 메우고 물길을 바꾸고 속도를 높이는 동안 우리는 생물 하나하나보다 그 사이의 관계를 먼저 끊어 왔다. 관계가 끊어지면 어떤 종도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

사라지는 것은 붉은발말똥게라는 한 종이 아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자연과 맺어 온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방식이다. 생명 다양성이란 많은 종의 나열이 아니라 서로를 떠받치며 작동하는 연결망의 이름이다. 그 연결을 이해하지 못하면 보호도, 사랑도 오래가지 않는다.

자연이 건네는 말은 분명하다. 생물을 지키려면 종을 보기 전에 관계를 보라고.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붉은발말똥게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갯벌을 움직인다. 그 조용한 움직임이 멈추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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