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독립투사 후손 어린이들의 ‘국적 넘은 하모니’
고려인마을 어린이 합창단, 서울 예원문화센터 ‘코리안 페스티벌’ 특별 출연
2017년 창단…국적·배경 달라도 ‘고려인’ 정체성 공유 음악으로 소통
“고려인 역사는 우리의 역사”…‘동요 메들리’·‘아름다운 세상’ 등 선보여
2026년 01월 13일(화) 19:45
광주 고려인마을 어린이합창단이 13일 서울 강서구 예원문화센터 스카이아트홀에서 열린 ‘코리안 페스티벌 2026’에 특별 출연했다. 합창단원들이 무대에 올라 리허설을 하는 모습. <광주고려인마을 제공>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색색의 중앙아시아 전통 의상을 갖춰 입은 아이들이 무대 위에 나란히 선다. 지휘자의 손짓에 맞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로 다른 언어로 살아온 시간, 서로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기억들이 한 박자씩 맞물리며 하나의 화음이 된다.

광주 고려인마을 어린이합창단이 13일 오후 7시 서울 강서구 예원문화센터 스카이아트홀에서 열린 ‘코리안 페스티벌 2026’에 특별 출연했다. 재외동포청이 주최하고 ㈜클공이 주관한 이번 행사는 ‘동향(同響): 같은 울림’을 주제로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재외동포 아티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다.

무대에 오른 고려인마을 어린이합창단은 노래를 통해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 회복과 한국 전통 보존·전파를 위해 지난 2017년 창단됐다. 독립투사 후손 4~5세 자녀 등 26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이다.

기자는 공연을 하루 앞둔 지난 12일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광주진료소 1층 연습실을 찾았다. 이날 연습에는 15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가사와 동선을 맞추며 노래에 몰두했다.

“머나먼 만리타향에서도 우리는 우리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기억 속에 우리의 얼과 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어린이합창단이 선보인 곡은 창작 뮤지컬 ‘나는 고려인이다’의 넘버 ‘동요 메들리’, ‘우리말 교육’과 박학기 작사·작곡의 ‘아름다운 세상’이다. 아이들은 한 글자 한 글자 가사에 집중하며 노래했고, 팔을 크게 움직이며 율동을 맞췄다. 연습이 끝난 뒤에도 “이 부분에서 언제 돌아야 할까”를 놓고 의견을 나누며 동작을 반복했다. 대화에는 한국어와 러시아어가 자연스럽게 섞였다.

어린이합창단의 단장이자 지휘자인 조정희 호남대 교수는 “서로 다른 국적과 배경을 지녔지만 ‘고려인’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공유한 아이들이 음악으로 소통하는 공간”이라고 합창단을 설명했다.

합창단에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다양한 출신의 아이들이 함께하고 있다. 언어 장벽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조 교수는 “통역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두 언어에 모두 익숙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다리가 돼줬다”며 “처음에는 서로 낯설었지만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조금씩 가까워졌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음악의 힘을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광주 고려인마을 어린이합창단이 공연을 앞두고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광주고려인마을 제공>
초창기 연습 과정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무대를 즐기는 아이들이 모인 일반적인 어린이합창단과 달리, 낯선 환경에 적응하던 고려인 아이들은 목소리를 내는 일부터 부담스러워했다. 조 교수는 “아이들에게 ‘포기하지 말자’,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달래며 연습과 무대를 이어갔다”며 “그 과정에서 아이들 스스로 변화를 느끼고, 점차 무대를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평소에는 소극적이고 자기 표현이 어려운 아이들도 노래를 할 때만큼은 표정과 목소리가 달라진다”며 “그 변화를 지켜보는 시간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덧붙였다.

합창단에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광주에 정착한 아이들도 있다. 조 교수는 “밝아지긴 했지만 어떤 아이들은 여전히 내성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며 “특히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쓰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합창단 활동과 공연을 통해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에서 안도감도 느낀다”고 했다.

합창단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2024년 곡성에서 열린 ‘심청전 전국 어린이 합창대회’를 통해서다. 조 교수는 “대회 준비 과정에서 목표를 세우고 반복 연습을 하면서 아이들이 크게 달라졌다”며 “자신이 실수하면 팀에 영향을 준다는 걸 경험하면서 책임감과 집중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합창단은 이 대회에서 동상을 받았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아니타(11) 양은 합창단 활동을 통해 가수를 꿈꾸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혼자 할 때는 떨리지만 친구들과 같이 노래하면 용기가 난다”며 “무대에 서도 떨리지 않고 노래하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조 교수는 “고려인의 역사는 곧 우리의 역사”라며 “이번 공연을 계기로 이 아이들이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 미래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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