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기자의 육아일기] 80년대 맞벌이 남복남씨
프롤로그
직장과 가정 사이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
먹고 사느라 함께 못해준 미안함
“손주 황혼 육아하며 원 풀고 있죠”
2026년 01월 01일(목) 15:55
1980년대 아이 키우랴 일하랴 힘든 나날을 보낸 남복남씨는 황혼 육아와 취미 생활을 하며 인생 2막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광주·전남 맞벌이가 45만 가구를 넘기며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한국사회에서 오랜 기간 ‘주 양육자=엄마’라는 공식이 내려왔지만, 최근에는 부부가 공평하게 육아 분담을 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일하는 엄마’ 즉 ‘워킹 맘’(Working Mom)으로 사는 것은 매일 치르는 시험과 같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숨 가쁘게 일과 육아를 병행하지만 ‘이게 맞나’ 하며 자신을 의심하는 날이 늘어간다. 하지만 일하며 얻는 성취감과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기쁨은 ‘일하는 엄마’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일 것이다.

광주일보 ‘엄마 기자’들은 첫돌이 지난 아이를 키우는 워킹 맘의 시선으로 육아 일상을 그려낼 예정이다.

그에 앞서 맞벌이가 흔하지 않았던 1980년대 두 자녀를 키워낸 엄마와 ‘코로나둥이’를 낳은 89년생 엄마를 만나 육아 후기를 들어봤다.



가난했던 시절, 생때같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지만 예순을 넘긴 노모의 가슴에는 늘 ‘못해준 것들’만 남아 있다. 남복남(66) 씨가 3년 전 밥벌이를 접고 인생 2막으로 ‘황혼 육아’를 시작한 이유다.

“어린이날이면 다들 놀러 가는데, 엄마는 왜 항상 일만 해?” 먹고사는 게 전부였던 어느 날, 어린 딸이 던진 한마디는 지금도 박 씨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딸은 불혹을 넘겼지만, 어린 딸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저려온다.

“지금이라도 자식에게 못 해준 것들, 손주 보면서 다 해주고 싶어요. 하원하고 오면 살갑게 인사해주고, 성탄절 같은 날엔 통닭도 시켜주고요.”

남 씨가 ‘할마(할머니+엄마)’로 변신하는 시간은 매일 오후 3시다. 딸의 집으로 향해 맞벌이 부부가 미처 챙기지 못한 집안일을 하나둘 해낸다. 밀린 빨래와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8살 손주가 집에 들어선다. 이어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 손주까지 돌아오면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된다. 첫째와 둘째가 어느 정도 자라 손이 덜 가는 것만으로도 그는 한숨을 돌린다. 아이들 밥을 챙기고 씻기고 재워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밤 9시. 남 씨는 “어릴 때부터 몸 써가며 일한 게 몸에 배어 고단함도 잘 모르겠다”며 웃어 보였다.

인생2막으로 황혼육아 중인 남복남씨가 취미생활로 기타를 배우고 있다.
그의 삶은 늘 노동의 연속이었다. 1980년대, 살림 밑천 없이 결혼한 그는 만삭의 몸으로도 일을 놓을 수 없었다. 첫째를 낳고 사흘 만에 다시 일터로 나섰다. 남편 시댁이 있는 전북 고창에서 방 한 칸짜리 신혼집을 꾸리고 하루하루 살림을 불려나갔다. 아이들과 오순도순 지내기엔 삶이 너무 팍팍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농협 공판장에서 중매인 일을 했다. 여유가 없던 시절,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첫째를 등에 업고 물건을 떼러 다닌 날도 있었다. 새벽부터 고창 공판장을 시작으로 광주 양동시장, 남광주시장, 각화동 공판장을 돌며 과일과 생선을 트럭에 싣고 마을마다 팔았다.

인생2막으로 황혼육아 중인 남복남 씨가 과거 아이들과 찍은 사진은 한장뿐이다.
대여섯 살 아이들은 집 근처 교회 어린이집에 맡겼다. 이웃집처럼 정이 오가던 곳이라 아이들 밥까지 챙겨주니 마음 놓고 일을 나설 수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첫째는 둘째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과 집을 오가며 동생을 돌봤다. 이제 돌이켜 보니, 그 교회마저 없었다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뒤 남 씨는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보다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민간병원에서 경험을 쌓은 뒤, 국가자격증 제도가 도입된 2008년 1기로 자격을 취득했다.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광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이후 20여 년간 요양보호사로 현장을 지켰다. 전문적인 직업의식과 소명을 갖고 일해왔지만, 결국 그는 경력을 내려놓고 황혼 육아의 길로 들어섰다.

“고단한 세월이었지만 아이들이 사고 한 번 안 치고 알아서 잘 자라줬어요. 엄마로서 완벽하진 못했지만, 내 힘으로 먹이고 입히고 책임졌다는 점에서 후회는 없어요.”

남 씨의 마지막 꿈은 ‘음악 봉사’다. 그는 “손주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오전 시간에는 드럼과 기타를 배우고 있다”며 “먹고살기 바빴던 세월이 끝나고 이제야 보상받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글·사진=도선인 기자 sunin@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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