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사회 공공교통을 다시 그리다 - 윤희철 한국지속가능발전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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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있지만 탈 수가 없습니다.”
광주 외곽의 농촌 동에서 만난 한 어르신의 말이다. 정류장은 남아 있지만 시간표는 사라졌고, 하루 한두 번 오가는 버스는 병원 진료 시간과 맞지 않는다. 젊은 세대가 줄어든 마을에서 운전자를 찾기도, 수요를 채우기도 어렵다. 길은 여전히 있지만 그 길은 사람을 어디에도 데려다주지 못한다. 이것이 장수사회가 마주한 ‘길의 역설’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교통을 효율의 문제로 다뤄왔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싸게. 그러나 인구가 줄고 고령화가 깊어지며 재정이 한계에 다다른 지금, 효율의 언어는 더 이상 지역의 삶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제 교통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이동권’의 문제다. 병원에 갈 수 있는가, 시장에 닿을 수 있는가, 행정복지센터를 찾아갈 수 있는가. 이 단순한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지 못한다면, 이미 그 사회는 불평등하다.
광주의 농촌 동 지역은 그런 불평등의 현장이다. 도시 행정구역 안에 있지만 대중교통의 사각지대다. 출퇴근 시간에는 버스가 있지만 낮에는 이동수단이 끊긴다. 행정 경계로는 도시지만 생활권으로 보면 사실상 ‘교통 약자 마을’이다. 송정역에서 멀지 않은 본량동이나 삼도동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병원, 시장, 복지시설이 모두 차로 20분 거리 안에 있지만 ‘탈 수 있는 수단’이 없으면 그 20분은 결국 ‘불가능한 거리’가 된다.
전남의 인구감소지역도 비슷하다. 면 단위 마을버스나 수요응답형 교통(DRT)이 생기고 있지만 재정 지원이 끊기면 바로 멈춘다. 지원이 있을 때만 돌아가는 한시적 서비스는 주민의 신뢰를 쌓지 못한다. 교통이 끊기면 시장과 병원이 멀어지고 돌봄 체계와 공동체의 관계망도 함께 약해진다. 그렇게 마을은 서서히 비어간다. ‘교통이 없는 지역은 사람이 없는 지역’이 되고, 떠나는 인구가 늘수록 교통은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동의 문제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존엄의 문제다. 교통은 단지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선이다. 한 노선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것은 단지 이동이 아니라 관계망이다. 마을버스 한 대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일상을 이어주는 공동체의 약속이다. “버스 한 대로 마을이 유지된다”는 말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일본은 이 문제를 20년 먼저 경험했다.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교통망이 무너졌을 때, 지방정부는 주민과 함께 ‘공영형 마을버스’와 ‘자원봉사 운전제’를 만들었다. 의료·장보기 일정에 맞춰 요일별로 운영되는 소형 전기버스, 마을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차량 공유. 차량은 대부분 9인승 밴이나 소형 전기차였지만 운영은 주민의 손에 달려 있었다. 행정은 최소한의 지원을 하되 마을이 스스로 운영하는 구조였다. 그 결과 교통은 행정의 서비스가 아니라 이상적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주민이 직접 설계하는 삶의 네트워크’로 자리 잡았다. 교통이 회복되자 돌봄과 지역경제도 조금씩 되살아났다.
프랑스는 한발 더 나아가 ‘이동할 권리’를 법으로 규정했다. 2000년의 ‘연대와 도시재생법(SRU)’은 이동을 시민의 권리로 명시했고 2019년 ‘교통수단기본법(LOM)’은 교통을 기후대응과 사회통합, 디지털 전환과 연결된 공공서비스로 확장했다. 즉 “이동은 선택이 아니라 권리”라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스의 지방정부는 이 원칙을 기반으로 농촌·산간 지역에도 공공 교통망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와 지역이 공동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광주와 전남의 교통은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은 재정 효율과 노선 감축의 논리, 다른 한쪽은 이동권과 존엄의 논리다. 장수사회로 갈수록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이다.
이동권은 이제 복지정책의 부속이 아니라 지속가능사회의 기초 인프라다. 교통을 환경, 돌봄, 경제, 참여의 영역과 함께 다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함께 설계할 시민의 참여와 공공의 상상력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 누구도 해법을 모르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장수사회에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이다. 버스 한 대로 존엄이 지켜지고 노선 하나로 공동체가 이어지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다시 그려야 할 장수사회의 공공교통이다.
광주 외곽의 농촌 동에서 만난 한 어르신의 말이다. 정류장은 남아 있지만 시간표는 사라졌고, 하루 한두 번 오가는 버스는 병원 진료 시간과 맞지 않는다. 젊은 세대가 줄어든 마을에서 운전자를 찾기도, 수요를 채우기도 어렵다. 길은 여전히 있지만 그 길은 사람을 어디에도 데려다주지 못한다. 이것이 장수사회가 마주한 ‘길의 역설’이다.
광주의 농촌 동 지역은 그런 불평등의 현장이다. 도시 행정구역 안에 있지만 대중교통의 사각지대다. 출퇴근 시간에는 버스가 있지만 낮에는 이동수단이 끊긴다. 행정 경계로는 도시지만 생활권으로 보면 사실상 ‘교통 약자 마을’이다. 송정역에서 멀지 않은 본량동이나 삼도동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병원, 시장, 복지시설이 모두 차로 20분 거리 안에 있지만 ‘탈 수 있는 수단’이 없으면 그 20분은 결국 ‘불가능한 거리’가 된다.
이동의 문제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존엄의 문제다. 교통은 단지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선이다. 한 노선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것은 단지 이동이 아니라 관계망이다. 마을버스 한 대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일상을 이어주는 공동체의 약속이다. “버스 한 대로 마을이 유지된다”는 말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일본은 이 문제를 20년 먼저 경험했다.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교통망이 무너졌을 때, 지방정부는 주민과 함께 ‘공영형 마을버스’와 ‘자원봉사 운전제’를 만들었다. 의료·장보기 일정에 맞춰 요일별로 운영되는 소형 전기버스, 마을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차량 공유. 차량은 대부분 9인승 밴이나 소형 전기차였지만 운영은 주민의 손에 달려 있었다. 행정은 최소한의 지원을 하되 마을이 스스로 운영하는 구조였다. 그 결과 교통은 행정의 서비스가 아니라 이상적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주민이 직접 설계하는 삶의 네트워크’로 자리 잡았다. 교통이 회복되자 돌봄과 지역경제도 조금씩 되살아났다.
프랑스는 한발 더 나아가 ‘이동할 권리’를 법으로 규정했다. 2000년의 ‘연대와 도시재생법(SRU)’은 이동을 시민의 권리로 명시했고 2019년 ‘교통수단기본법(LOM)’은 교통을 기후대응과 사회통합, 디지털 전환과 연결된 공공서비스로 확장했다. 즉 “이동은 선택이 아니라 권리”라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스의 지방정부는 이 원칙을 기반으로 농촌·산간 지역에도 공공 교통망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와 지역이 공동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광주와 전남의 교통은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은 재정 효율과 노선 감축의 논리, 다른 한쪽은 이동권과 존엄의 논리다. 장수사회로 갈수록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이다.
이동권은 이제 복지정책의 부속이 아니라 지속가능사회의 기초 인프라다. 교통을 환경, 돌봄, 경제, 참여의 영역과 함께 다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함께 설계할 시민의 참여와 공공의 상상력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 누구도 해법을 모르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장수사회에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이다. 버스 한 대로 존엄이 지켜지고 노선 하나로 공동체가 이어지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다시 그려야 할 장수사회의 공공교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