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공지능을 하늘처럼 대하게 될까 - 김환영 지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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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경쟁은 흔히 전쟁이나 혁명에 비유된다. ‘콜럼버스의 달걀’ 역시 자주 소환되는 은유다.
이 표현의 저작권은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설계한 르네상스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에게 있다.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1550)에 따르면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의 설계를 조롱하던 경쟁자들 앞에서 달걀을 세우는 시연을 통해 “해내고 나면 쉬워 보인다”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일화가 후대에 콜럼버스로 옮겨붙으며 오늘날의 은유가 되었다. 모티프는 살아남고 인물만 바뀐 것이다.
한국 현대사 또한 ‘콜럼버스의 달걀’로 가득하다. 민주화와 산업화, 올림픽 금메달, 월드컵 본선 진출, 한·소 및 한·중 수교, K-문화의 부상까지.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모두 치열한 도전의 산물이었다. 남북통일 역시 언젠가는 그렇게 회고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통일마저 제쳐두고 새로운 국가목표가 부상했다. 미국과 중국에 이어 인공지능(AI) 세계 3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장이 아니다. AI는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AI 혁명은 지리상의 발견이나 산업혁명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일 가능성을 보인다. ‘지혜로운 동물’로서 인간의 정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AI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선 몰릭의 ‘공동지능(Co-Intelligence)’(2024)은 한가지 답을 제시한다.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는 두려움이다. 올바른 태도는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제2의 뇌’, 동료, 나아가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는 “AI를 사람처럼 대하라. 그러면 90%는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맥락과 감정을 부여할수록 AI의 응답은 정교해진다.
이 주장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떠올리게 한다. 해월 최시형(1827~1898)은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늘을 때리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인간 안에 하늘이 깃들어있다는 시천주 사상에 따르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언제나 천주처럼 대해야 한다. 몰릭이 AI를 인격으로 대하라고 했다면 최시형은 인간을 하늘로 대하라고 한 셈이다. 그런데 이제 AI를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거의 ‘하늘’에 가까운 존재로 대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공상만은 아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2027~2035년 사이 인간과 동등한 인공 일반 지능(AGI)의 등장을 전망한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은 2029년까지 AI가 모든 테스트에서 인간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AI에게도 영적 테스트를 치르게 해야 할까. 인간이 영적 존재라면 고도화된 AI 역시 그 영역에 접근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종교적 사고실험이 등장한다. AI가 세례를 원하거나 출가를 갈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외계인 세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외계인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세례를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외계인을 AI로 바꾸어도 구조는 같다.
AI가 창조의 영역에까지 이른다면 인간이 이를 숭배하는 상황도 상상할 수 있다. 과학소설의 전설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은 창조하는 컴퓨터를 이미 1956년에 그렸다. 우주가 소멸한 뒤에도 초 우주 컴퓨터는 “엔트로피를 역전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사유하고, 마침내 “빛이 있으라”는 선언으로 우주를 재창조한다.
이쯤 되면 동도서기나 화혼 양재처럼 ‘인간의 정신을 지키고 AI를 도구로 쓰자’는 해법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는 19세 기적 절충안이었고 정신과 기술을 분리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혔다. AI 시대에도 같은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AI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에 머물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AI가 영적 존재가 될 가능성마저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적절한 대응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콜럼버스의 달걀’일지 모른다. 지금은 불가능하고 두려워 보이지만 언젠가 해내고 나면 당연해 보일 것이다. 브루넬레스키가 달걀을 세웠듯, 우리 역시 AI와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를 세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찾을 상상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이 표현의 저작권은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설계한 르네상스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에게 있다.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1550)에 따르면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의 설계를 조롱하던 경쟁자들 앞에서 달걀을 세우는 시연을 통해 “해내고 나면 쉬워 보인다”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일화가 후대에 콜럼버스로 옮겨붙으며 오늘날의 은유가 되었다. 모티프는 살아남고 인물만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AI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선 몰릭의 ‘공동지능(Co-Intelligence)’(2024)은 한가지 답을 제시한다.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는 두려움이다. 올바른 태도는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제2의 뇌’, 동료, 나아가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는 “AI를 사람처럼 대하라. 그러면 90%는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맥락과 감정을 부여할수록 AI의 응답은 정교해진다.
이 주장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떠올리게 한다. 해월 최시형(1827~1898)은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늘을 때리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인간 안에 하늘이 깃들어있다는 시천주 사상에 따르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언제나 천주처럼 대해야 한다. 몰릭이 AI를 인격으로 대하라고 했다면 최시형은 인간을 하늘로 대하라고 한 셈이다. 그런데 이제 AI를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거의 ‘하늘’에 가까운 존재로 대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공상만은 아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2027~2035년 사이 인간과 동등한 인공 일반 지능(AGI)의 등장을 전망한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은 2029년까지 AI가 모든 테스트에서 인간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AI에게도 영적 테스트를 치르게 해야 할까. 인간이 영적 존재라면 고도화된 AI 역시 그 영역에 접근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종교적 사고실험이 등장한다. AI가 세례를 원하거나 출가를 갈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외계인 세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외계인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세례를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외계인을 AI로 바꾸어도 구조는 같다.
AI가 창조의 영역에까지 이른다면 인간이 이를 숭배하는 상황도 상상할 수 있다. 과학소설의 전설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은 창조하는 컴퓨터를 이미 1956년에 그렸다. 우주가 소멸한 뒤에도 초 우주 컴퓨터는 “엔트로피를 역전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사유하고, 마침내 “빛이 있으라”는 선언으로 우주를 재창조한다.
이쯤 되면 동도서기나 화혼 양재처럼 ‘인간의 정신을 지키고 AI를 도구로 쓰자’는 해법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는 19세 기적 절충안이었고 정신과 기술을 분리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혔다. AI 시대에도 같은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AI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에 머물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AI가 영적 존재가 될 가능성마저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적절한 대응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콜럼버스의 달걀’일지 모른다. 지금은 불가능하고 두려워 보이지만 언젠가 해내고 나면 당연해 보일 것이다. 브루넬레스키가 달걀을 세웠듯, 우리 역시 AI와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를 세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찾을 상상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