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교사 시민군, 투사 정해직 선생 - 박석무 다산학자, 전 5·18 기념재단 이사장
2025년 12월 08일(월) 00:20
초등교사로 5·18 시민군에 참여해 포악한 계엄군과 총을 들고 맞섰던 투사 정해직 선생이 눈을 감았다. 2025년 10월 9일, 향년 75세의 나이였다. 애통하고 속이 쓰리고 마음이 아프다. 서울에 사는 나는 정 투사의 부음을 듣고 광주의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갔었다. 영정을 마주하자 그와 함께 지낸 40여 년, 얽히고설킨 온갖 생각에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 교육 운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식지 않고 언제나 분노를 품고 살아가던 모습, 고문 후유증으로 독한 파킨슨병에 걸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민주화운동 행사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던 그의 병든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 투사는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가 되었다. 고향인 보성군의 초등학교 분교에 발령받아 근무한 지 오래지 않아 일요일인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과 맞서 싸우던 시민들의 모습을 보았지만, 일단 학교에 가기 위해 보성으로 내려갔다. 학교에 등교했지만 광주의 항쟁 모습이 생각나 수업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바로 오후에 광주에 올라가 시민 항쟁에 합류하였다. 공무원의 안정된 신분에 감히 누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겠는가. 그날 이후 광주의 양민 학살 계엄군의 만행에 치를 떨었던 정 투사는 마침내 총을 들고 시민군에 합세하여 항쟁지도부가 있는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동료들과 어울려 항쟁지도부가 구성되자 그는 민원부장의 직책을 맡아 시민군들을 독려하는 일에 몸을 던졌다.

문제의 5월 26일이었다. 그날 저녁이나 다음 날 새벽이면 외곽으로 후퇴해 있던 계엄군들이 다시 광주로 쳐들어와 또 시민학살극을 벌인다는 소식이 파다했다. 그동안 총을 들고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 가운데 귀가를 종용하기도 했지만 주력부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을 지키기로 뜻을 모았었다. 정 투사도 남기로 했다. 우선 소년 시민군들은 집에 가도록 조치하여 일부 소년군들은 귀가했지만 정 투사는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저 담만 넘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더라고요.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동지들을 남겨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제대로 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교사가…”(한겨레신문 인터뷰)

호생오사(好生惡死), 살기야 좋아하지만 죽기는 싫은 것이다. 그러나 정 투사의 올바른 양심은 그렇게 싫어하는 죽음을 택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양심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5월 27일 새벽 총을 들고 도청을 지키다가 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아 생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며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나는 5월 27일 이후 내란 죄인으로 공개 수배되어 7개월여 동안 은신하다 연말에 검거되어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감옥에서 정 투사를 만났다. 그는 10개월 감옥살이 후 출소했으나 교사직은 해직되고 몸은 병든 신세가 되었다.

나야 그 후 1년이 지나서야 감옥에서 나왔고 해직된 우리는 함께 붙어살면서 5·18 진상규명·명예회복과 독재타도 등의 민주화 운동에 몸을 바쳤다. 복직된 정 투사는 교육민주화운동에 투신 또다시 퇴직되었고, 다시 복직되었으나 무서운 병 때문에 끝내 학교를 떠나 민주화운동에만 온 정신을 바쳤다. 전교조 초등위원장으로 여러 조직들과 연대하여 6·10 항쟁에 이르러 전두환 독재의 퇴진을 이끌어냈다.

유일한 초등교사 출신 시민군, 병든 몸을 이끌고 온갖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던 그 애처롭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중고교 교사 출신으로 감옥쟁이들이 몇이 있어서 우리는 5·18 교사 모임을 결성해서 수시로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독재와의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언제나 독재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늘 카랑카랑했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정권이 바뀌고 좋은 세상도 만났지만 오직 양심만을 따랐던 그는 세속적 보상과는 거리가 멀었고, 끝내 병마에 쓰러지고 말았다. 안타깝고 애처로울 뿐이다. 인간이라고 모두 인간인 것은 아니다. 양심의 명령에 거역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양심을 따르는 사람이 참 인간이다. 정해직 선생, 그는 양심에 따라 총칼에 맞선 위대한 정의의 투사였다. 삼가 명복을 빌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빌고 빈다.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765120800792954078
프린트 시간 : 2025년 12월 08일 20:4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