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의 ‘여백서원에서’] 대책없는 현실 앞에서 -괴테의 축제극 ‘에피메니데스의 깨어남’
2025년 12월 04일(목) 00:20
‘에피메니데스의깨어남’은 1814년의 해방전쟁으로 나폴레옹의 지배를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공연을 위해 의뢰받은 작품으로 1815년 3월 30일과 31일 양일에 베를린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되었다. 축제극 대본으로 쓰였고, 이듬해에 수정해서 펴냈다. 2막극인데 대사의 대부분이 시와 노래라 희곡이기보다는 오페라 대본으로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대부분악령, 사랑, 믿음, 희망같은의인화된 알레고리라우의극이기도 하다. 매우 고전적인 언어임에도 여느 고전극과는 달리, 지문이 매우 상세하여 무대 설명은 물론 인물들의 세세한 동작까지 지시해놓았다.

그리스 신화가 소재이다.에피메니데스는크레타 섬에서아버지의 양들을 돌보던 목동이었는데 양떼를 잃어 찾으러 다니다가 어떤 동굴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깊은 잠에 빠져 57년을 잤다.얼마나 잤는지 모르고 다시 깨어나자 본인은 현인이 되어 있었고 세상은 놀랍게 달라져 있었다. 집으로 가보니 형제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후에 그리스 전역에서 신들의 총아로 여겨지기 시작했으며 크레타에서 백 년 이상 살고 죽자, 신으로 추앙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의 일곱 현자들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아무튼(난세를 겪지 않고, 아무런 공로도 없이) 잠을 자서 지혜로워진 사람이다. 잠에서 깨어남과 지혜로운 개안(開眼)이라는 오래된 소재를 가져와 괴테는 자신의 당대의 세계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극을 구성했다.

주인공 에피메니데스는 잠자고 깨어난 사람인데 이 작품읭 발단에서 또다시 잠을 자러간다. 바깥에서는 그의 지혜로도 통찰이 안되는 어려운 상황이 전쟁 발발의 나팔소리가 시작되는데 말이다.

전쟁은 1막 전체에서 그가 다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벌어지고, 압제의 악령 등 여러 악령을 통하여 표현되어 있다. 현재는 “수정구슬 속의 것인양 투명하게 보이건만 미래는 한 치도 보이지 않아ㅡ미래의 통찰까지 기대하며ㅡ 다시 잠에 든 에피메니데스가 2막 후반부, 즉 작품 끝에 가서야 전쟁이 휩쓴 폐허를 직면하며 깨어나기는 하지만, 그 자신의 대사는 몇 마디 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유일한 행동은 압제에 맞서는 여러 민족의 연합을 축복하며 소개하는 것뿐이다.지금껏 숨겨져 있던 베일 쓴 여인을 앞으로 인도하고 그녀의 베일을 뒤로 걷는다.”뿐이다. 그것이 결성되는 연합군의 소개인데, 그나마 대사가 아니고 지문이다.

그의 지혜는 ‘희망’, ‘믿음’,‘사랑’ 같은 우의적 인물들을 통해 의인화되어 간접적으로 표명될 뿐이다.(‘서.동 시집’의 시편 부분도, 폭압의 세월을 잠 자며 넘기고, 긴 세월 후에 깨어나 달라진 낯선 현실을 직면하지만, 결국 다시 잠자러 가는 ‘일곱 잠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매우 현실적인 계기에 쓰인 작품의 주인공이, 더구나 현인(賢人)이, 왜 좋은 말 좀 하지 않고 이렇듯 잠만 자는 것일까. 왜 이리 무력해 보이는 것일까. 왜 그 얼마 안 되는 발언마저 죄다 이리 추상적일까. 마침내 평화의 전망이 열리면 감격하여 환호작약케 해야할 것같은데 괴테는 왜 이런 작품을 썼을까. 동시대사가 배어있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의 주인공이, 그것도 현인이, 잠을 자는 사람이라니. 의문에 의문이 든다.

‘에피메니데스의깨어남’은 나폴레옹을 격파한 직후의 축하공연으로 기획된 극이다. 전쟁뿐만 아니라, 이 극 공연 중에 열리고 있던비인 회의(1814년9월-1815년 6월)가 장면 전체 배경에서 어른거린다. 나폴레옹의 지배는 여러 민족이 힘을 합쳐끝냈다지만, 비인회의는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유럽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유럽 여러 제후들이 모여 반동복고적인 기조로 유럽을 재편하는 대책을 꾀하던 것이었다. 그런 회의마저 마냥 늘어져 “회의는 춤만춘다”라는 비판을 낳았을 만큼 유럽 전체의 정국이 대책없이 혼미했던 때이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현실 앞에서 괴테는 이런 기이한 작품을 썼다. 그 어떤 대책의 제시나 저항의 언어는 어쩌면 허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독특하게 현실적이기도 하다. 아무려나 시대의 알레고리일뿐더러 동시에, 문학의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읽는 사람은, 막막한 현실 앞에 망연히 선 사람들의 마음도 새삼 헤아려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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