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니얼 - 이보람 예향부 부장
2025년 12월 03일(수) 00:20
김장 시즌이다. 아침 공기가 달라지고 마트 앞에 절인 배추를 옮기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겨울 초입의 분주함이 느껴진다. 전통시장을 다녀온 어머니들의 장바구니에는 굵은 소금과 고춧가루, 생강과 마늘이 묵직하게 담기고 주택가 골목에서는 배추 씻는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이맘때가 되면 늘 한 가지 풍경을 떠올린다. 등허리를 따뜻하게 감싸던 외할머니의 꽃무늬 털조끼다. 김장을 할 때면 꼭 꺼내 입으시던 그 조끼가 올해도 어김없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흥미로운 건 이제 그 조끼가 더 이상 할머니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할매 조끼’라 불리며 되살아난 털 조끼는 단순한 패션 아이템을 넘어 하나의 정서가 되었다. 애써 꾸미지 않은 듯 소박하지만 막상 입으면 묘하게 따뜻해지는 옷. 여기에 손뜨개 가방, 자수 손수건, 꽃무늬 앞치마까지 더해지면서 ‘할매 감성’은 새로운 유행의 언어로 자리잡았다.

오래된 것을 촌스럽다고 치부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히려 할머니의 옷장에서 꺼낸 듯한 낡고 편안한 물건들이 요즘 사람들에게는 더 큰 안정감을 준다. 이름도 재미있게 붙였다. 할매(할머니)와 밀레니얼을 합친 ‘할매니얼’. 할머니 세대의 취향과 감성, 문화를 즐기는 젊은 세대의 트렌드를 뜻한다.

버리고 새로 사는 것보다 오래 고쳐 쓰고 아끼는 방식이 더 마음에 남는 때가 있다. 뜨개실의 따스한 질감, 오래된 앞치마의 주름, 오래 묵은 찬장의 나무결에서 익숙한 위로를 느낀다. 손으로 만드는 과정이 주는 위로와 기다림의 깊이, 익어가는 시간을 지켜보는 기쁨. 이 모든 것이 ‘할매니얼’이라는 말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할매 조끼’를 보면서 단순한 유행보다 마음속 따뜻함이 다시 살아난다. 오래된 것에 담긴 손길, 누군가를 위해 따뜻함을 챙기던 마음, 시간이 쌓여 만들어낸 정서까지,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살면서도 많은 이들이 끝내 놓지 못하는 감정들이다. 김장철처럼 소란하고 따뜻한 풍경 속에서 잊고 지냈던 방식을 다시 기억해내는 일.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작은 매뉴얼인지 모른다.

/이보람 예향부 부장 bora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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