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가 숨을 삼키듯 어둠에 잠기자, 어스레한 조명 아래 첫 울림이 울려 퍼진다. 첼로의 깊은 음은 낮게 흐르고 뒤이어 비올라의 다정한 중음과 바이올린의 섬세한 선율이 차례차례 쌓인다.

에피타이저처럼 감각을 깨우는 첫 음에서 시작해 점차 밀도를 더하는 메인, 그리고 설렘을 남기는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여섯 개의 현이 만들어내는 음향은 완성도 높은 북유럽식 코스요리와 같았다. 한 음 한 음이 눈앞에서 직접 조리되는 듯 살아 움직이며 공연장의 분위기를 돋웠다.

지난 19일 광주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펼쳐진 ‘제36회 이건음악회’. 이건홀딩스가 주최하고 광주일보가 후원한 이번 공연에는 노르웨이 챔버 오케스트라(NCO) 현악 6중주단이 북유럽 특유의 절제된 감성과 대담한 실험성이 맞닿은 사운드를 선보였다.

1977년 창단된 NCO는 세련된 음색과 과감한 해석으로 국제 클래식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체임버 오케스트라로 꼽힌다. 예술감독 페카 쿠시스토의 지휘 아래 ‘살아 움직이는 클래식’을 구현하며 음악의 경계를 넓혀온 단체로 평가받는다.

이날 무대에는 NCO를 대표하는 현악 6중주단이 함께했다.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발레 오케스트라 제1콘서트마스터이자 NCO의 핵심 멤버인 바이올리니스트 카타리나 첸을 비롯해 사라 외빙에(바이올린), 한네 셸브레드·마르테 후숨(비올라), 아우둔 산비크·올레 레에(첼로)가 다채로운 음향의 층위를 만들어냈다.

공연의 초반부는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첼로 독주로 시작한 연주는 악기가 하나씩 더해지며 6중주로 완결되는 구성으로, 마치 한 상의 코스요리가 차례로 내어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아벨의 ‘아르페지오 d단조’ 로 막을 올린 무대에서는 어둠 속에서 첼로의 단음이 퍼져 나가며 객석의 감각을 서서히 깨웠다. 은근한 긴장 위로 비올라가 합류해 캐롤라인 쇼의 ‘석회암과 펠트’로 확장했고, 이어 베토벤 ‘현악 3중주 3번 G장조-스케르초’가 바이올린·비올라·첼로의 정교한 선율과 어우러졌다.

덴마크 민요 ‘스테델릴(Stædelil)’과 그리그의 ‘홀베르그 모음곡’에 이르자 여섯 연주자가 무대 위에 자리해 현악 6중주의 음향을 풍성하게 펼쳤다.

공연이 끝난 후 사인회에서 첼리스트 아우둔 산비크가 관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건홀딩스 제공>

공연의 ‘메인 디시’는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이었다. 독일 시인 리하르트 데멜의 시 ‘두 사람’을 바탕으로 한 이 곡은 달빛 어린 겨울 숲길을 걷는 남녀의 마음속에서 교차하는 고백과 절망, 용서와 화해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비춘다. 연주에 앞서 시가 낭독되자 관객들은 작품이 발현하는 정서를 느끼며 자연스레 음악에 빠져들었다.

낮게 울리는 현의 떨림 사이로 “다른 남자의 아이를 품었다”는 여인의 고백은 서늘한 긴장감을 불어 넣었지만, 이어 남자가 그녀와 아이를 모두 받아들이는 순간은 빛이 스며드는 듯 따뜻함이 전해왔다.

잘 차려진 ‘본식’을 지나자 분위기는 단번에 가벼워졌다. 디저트 코스처럼 이어진 무대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스무스 크리미널’과 BTS의 ‘다이너마이트’, 그리고 편곡 공모 선정작 ‘아리랑’이 연주되며 경쾌하면서도 감동적인 피날레를 장식했다.

공연 내내 연주자들은 객석을 바라보며 관객과 교감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카타리나 첸은 북유럽 신화 속 엘프를 떠올리게 하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동료와 호흡을 맞췄고, 사라 외빙에는 선율에 몸을 맡기듯 춤추는 동작으로 생동감을 보여주었다. 첼리스트 아우둔 산비크는 특유의 유쾌함으로 객석의 반응을 이끌어내 이목을 끌었다. 마지막에는 톱과 활을 이용해 ‘아리랑’을 들려주는 깜짝 연주로 공연장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