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호의 키워드로 읽는 광주·전남 미술사] 저항과 혁신의 욕구 분출 … 시각예술·참여미술 새 흐름 주도
(11) 1990년대 광주미술의 변혁기 -청년미술의 도전과 일탈
포스트 모더니즘 자극·기성체제 붕괴로 새로운 변화 열망
시대적 고뇌 동세대 공감대…모임 결성해 예술 담론 펼쳐
신생 미술단체, 파격적 형식의 설치작품·행위 예술 선보여
광주미술제, 지역 작가 200여명 연대 통한 예술활동
지역 미술계 화합·창작 생태계 조성·예술 대중화 노력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창설, 기존 시각 예술 무한 확장
2025년 11월 19일(수) 08:20
1994년 무등예술관의 ‘제9회 탈이미지회’ 전시 전경
광주·전남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혁의 시기는 1990년대이다. 5·18 이후 1980년대의 격변기 시국 상황과 87년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끈 민주화운동 과정, 학내 민주화운동, 그 속에 진행된 현실주의 미술운동, 86서울아시안게임에 이은 88서울올림픽 전후로 고조된 다양한 이국문화 접촉과 이 무렵 새로 흘러들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극, 1991년 소비에트연방 해체로 상징되는 기성체제의 붕괴 등등이 총체적으로 엮이어 90년대 전반기에 일탈과 혁신의 욕구들이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특히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전반기는 재학생 미술학도를 비롯, 신진·청년미술인들의 차오른 변화 욕구를 반영하듯 신생 모임의 결성과 발표전이 이어지고 해외 유학이 크게 늘어났다. 그런 이 지역 미술의 기세에 기름을 끼얹은 게 1995년 창설된 광주비엔날레이고, 여기에 1995년 97년 두 차례 광주통일미술제가 열기를 크게 북돋웠다. 크게 보면 1990년대 전반기는 기존 미술에 대한 저항과 일탈 욕구의 분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열망이 가장 뜨거웠던 시기다.



격변기 혼돈과 일탈 욕구 분출

1980년대 중후반 이후 정치 사회적으로는 민주화운동의 소용돌이, 미술계 내부적으로는 현실주의 참여미술의 확산 등 안팎의 거친 자극 속에서 수업기를 보내야만 했던 청년세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해 있었다. 참여와 순수, 민족주체성과 세계주의, 지역성과 국제성, 전통과 현대성 등 예술개념이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되물음과 숱한 갈등 번민의 진통기를 보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더 이상 자연 감흥에 자족하기도, 진부하고 권위주의적인 기성 미술계도 싫고, 그렇다고 이념에 복무하는 도구화된 현실주의 참여미술에도 공감할 수 없었다. 이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신구상이니, 신표현주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신조류에서 미적 형식과 표현 매체, 조형 실험, 시각적 소통방식을 새롭게 흡입하고 일부 그들 형식을 차용하기도 했다.

시대적 고뇌와 번민의 동세대 공감대를 느낀 이들은 이런 내적 갈등과 변화 의지를 결집해 탈출구를 열고자 크고 작은 미술단체들을 만들었다. 학내 동기나 같은 전공자들, 갓 졸업한 또래들끼리 모임을 결성해서 스터디를 통한 예술 담론을 파고들기도 하고 발표전을 갖기도 했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대상작 A.크쵸 ‘잊어버리기 위하여’
물론 1980년대 후반부터도 선배 작가들의 신생 미술단체들과, ‘시각매체연구회’(1986, 후의 광주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광미련), ‘광주청년미술작가회’(1987),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1988, 광미공) 같은 대외활동 지향형 단체를 비롯, ‘보다나리’(1988) ‘1982’ ‘표현 FIVE’(이상 1989) 등의 신예 모임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면서는 동시다발적으로 더 많은 단체들이 등장했다. 상당수 재학생 모임을 포함해 대부분 단체의 연령대가 훨씬 어려지고, 실험적 조형작업을 모색하기 위한 모임이 많았다. 이 가운데 많은 경우가 창립전만 갖거나 몇 년 지속하지 못하고 짧은 시기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예전과 다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이 1990년대 전반기 주요 단체들로는, 재학생 스터디그룹인 전남대 ‘죽림미술학회’와 조선대 ‘가랑미술학회’, ‘~ing’, ‘장과 현실’, ‘21세기 정신전’(이상 1990), ‘탈이미지회’, ‘표지-126˚E,35˚N’, ‘선후인’(이상 1991), ‘와퍽’(1992), ‘전위예술모임 노크’, 전남대 조선대 미술과 재학생 모임 ‘모주두’, ‘침몰 직후’(이상 1993), ‘LIVE’(1994) 등 모임의 이름이나 지향점부터가 과거 기성세대 단체들과는 달랐다. 실제로 이 시기 전시장에서 대담하고 파격적인 매체와 형식의 설치작품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예술의 거리에서 몸으로 절규와 발언을 토해내는 행위예술이 종종 펼쳐지기도 했다.

이 같은 1990년대 전반기 광주 청년미술의 열기를 결집하고 동세대 작가들끼리 연대를 통해 예술활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광주미술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주청년작가회가 주관을 맡아 출신학교나 장르, 화풍, 성향, 경력에 상관없이 광주 지역 200여 명의 젊은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대규모 민간 주도 청년미술 축제였다.

1993년 첫 회 때는 예술의거리 일대 화랑 갤러리 10여 곳을 연결하고, 이듬해 제2회 때는 광주천까지 장소를 확대해서 광주미술계의 화합과 통합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창작활동에 활기를 돋우고,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하고자 했다. 전시와 함께 세미나와 공연을 곁들이고, 작품 판매대금의 일부를 광주천 생태환경기금으로 조성하기도 했다. 이어 1995년 세 번째 행사는 사직공원 일대에서 지역과 장르를 뛰어넘는 민간 주도 예술문화마당으로 확장시킬 예정이었으나 광주비엔날레의 창설에 가려 중단되었다.

1995년 망월동 오월묘역의 ‘95광주통일미술제’ <조인호 대표 제공>
광주를 달군 광주비엔날레와 광주통일미술제

이렇듯 1990년대 들어 광주미술은 청년작가들의 의욕적인 활동으로 크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런 지역미술계의 자생적인 변화 열기 속에 1995년 9월 광주비엔날레 창설은 기존 시각예술의 개념과 형식을 완전히 깨트리는 획기적 기폭제였다. 그러잖아도 끓어오르는 변화 욕구와 돌파구를 찾는 갈증들이 잔뜩 차오르고 있을 때 광주비엔날레가 펼쳐놓은 세계 각지 각양각색의 실험적 시각예술 작품들은 일반 시민은 물론 지역미술인들을 큰 충격과 혼돈에 빠트렸다.

물론 많은 작가들이 지역정서나 기존 미술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비엔날레 작품들에 거부감을 갖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세계인 것으로 애써 외면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틀이 아직 굳지 않은 미술학도나 청소년, 작품에 변화가 절실했던 작가들에게는 현대미술의 개념과 방향성을 훨씬 자유롭고 폭넓게 확장시켜 준 창이기도 했다. 특히, ‘경계를 넘어’를 주제로 한 1995년 제1회(1995.9.20~11.20) 때의 제3세계 작가나 타국 청년세대 작가들 작품은 학교나 유명 미술지에서 접하지 못했던 비주류 창작세계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1997년 두 번째 비엔날레 때 ‘지구의 여백’(1997.9.1~11.27)에서는 국제 현대미술의 거장과 젊은 작가들의 조합으로 이미지와 메시지를 담아내는 시각예술의 스펙트럼을 무게감 있게 펼쳐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역미술계는 광주비엔날레를 갑자기 내리꽂힌 낯선 이벤트로 당혹스러워 했다. 게다가 정부 지원의 이 대규모 국제행사가 혹여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등이 미해결 상태인 광주의 상처와 아픔을 덮어 희석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시민사회의 의구심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받아들일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요구사항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비엔날레 추진이 강행되자 결국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광주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과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가 주축이 되어 민족 주체미술의 회복과 광주정신의 올바른 계승을 주장하며 비엔날레 기간 중 망월동 오월묘역에서 ‘광주통일미술제’라는 맞불을 놓은 것이다.

불과 80여 일 만에 서둘러 준비를 마친 광주통일미술제(1995.9.21~10.5)는 첫회 광주비엔날레가 야심차게 문을 연 바로 다음 날 망월동 묘역 일대에 거친 외침의 난장을 벌렸다. 묘역에 이르는 4km 오월길에 전국각지 각계 인사들이 참여한 1200여 장의 만장과 묘역 주변에 세운 간이전시대의 시국 관련 발언과 현실 비판적 작품들은 광주비엔날레의 파격성과는 또 다른 기운을 뿜어냈다. 이어 2년 뒤 두 번째 행사(1997.8.15~10.15)는 제2회 광주비엔날레 특별기념전 체제로 5·18 신묘역 일대에서 또 한 번 더 한국 현실주의 참여미술의 현장을 보여 주었다.

1990년대 들어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오르던 광주미술은 1995년 시작된 상반된 에너지의 광주비엔날레와 광주통일미술제를 통해 활화산처럼 터져 올랐다. 광주라는 도시를 세계 시각예술과 참여미술의 중요한 발신지로 각인시키게 된 것이다. 그 열기는 계속해서 신예 청년작가들의 더욱 대담한 도전과 일탈, 파격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광주미술의 신흥 조류를 만들어 나갔다.

조인호 전문가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 조선대 미술대 회화과, 홍익대 대학원 한국미술사 전공.

▲ (재)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정책기획실장 역임

▲‘남도미술의 숨결’, ‘광주 현대미술의 현장’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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