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소년 시민군’ 고 김향득 사진가 - 박석무 다산연구소 명예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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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소년 시민군’ 출신 김향득 사진가가 지난달 7일 저녁 7시 25분 별세했다. 향년 62.”
1980년 5월 민주항쟁 기간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투사회보’를 뿌리며 항쟁의 대열에 참여했던 소년투사였으나, 계엄군이 광주로 재진입한다는 소식을 듣자 총을 들고 YWCA 시민군 결집장소의 정문을 지킨 무장시민군으로 광주의 새벽을 지켜내다 끝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던 소년 ‘폭도’였다.
김 군이 눈을 감은 날짜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2023.2. 백산서당)이라는 책은 ‘10대들의 5·18 민중항쟁기록’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5월 27일 새벽을 지키다가 죽어갔거나 살아남아 민주주의를 회복하려 생을 걸었던 소년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그 책에 나오는 김향득 군의 이야기와 별세한 뒤 신문기사들을 참고하여 더 잊히기 전에 김 군에 관한 삶과 의혼을 알리고 싶었다.
1962년생인 김 군은 1979년 광주 대동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그때 나는 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김 군은 같은 학년 친구들과 함께 정부정책(유신시대)에 반대하는 시위를 교내에서 감행했었다. 그날이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데모 주동자로 7~8명이 수사당국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조사를 받았다. 퇴학당하고 구속되는 등 온갖 고생이 기다리던 때,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때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가 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모두 풀려났고 조사를 받게 되어 있던 나도 아무런 일이 없고 말았다. 그런 행운도 다 있었다.
그러나 해가 지나자 1980년 5·18에 그들 학생 대부분이 소년 시민군이 되고 총에 맞아 죽기도 했지만 끝내는 새벽을 지킨 소년들이 되었으니, 그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이 바로 김향득 군이었다. 체포되어 보안대로 끌려가 상무대 영창에 갇히면서 그들이 당한 고문과 탄압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음을 그들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문으로 몸이 위험해지자 2개월 만에 김향득은 출소했다. 그는 병을 앓으면서 학교에 다녔고 학교에서 배운 사진 기술로 사진작가가 되어 5월 이후의 광주·전남 민주화 역사를 앵글에 담기 시작했다. 수만 장의 사진을 남겼다니 그의 애국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영창에서 얻은 고문으로 인한 병은 끝내 그에게 파킨슨병으로 옮겨졌고, 병을 앓으면서도 그는 사진찍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2023년 4월 중순 자택에서 쓰러져 폐렴과 신우신염 진단을 받고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서 2년이 넘도록 신음하다 지난달 끝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오호 통재로다!
김 군은 고교생 시절부터 사회과학 서적 등을 탐독했고 독서회에 가담하여 많은 책을 읽으면서 유신독재에 맞서야 한다는 저항의식을 키웠다고 한다. 5월 26일 계엄군이 재진입하면 시민군은 모두 죽을 수밖에 아무런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죽기로 각오한 대학생 시민군들은 어린 학생들은 모두 귀가하라고 강하게 요구했지만, 새벽을 지킨 소년들은 거짓말까지 하면서 도청과 YWCA를 지키는 위대한 5·18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였다.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자는 위대한 희생정신을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 얼마나 거룩한 희생정신인가. 죽기는 싫고 살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마음이다. 그런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고 죽음을 택한 장엄한 애국심,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던 애국선열들과 무엇이 다른가.
선배 대학생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왠지 나 혼자 가기가 쑥스러웠어요. 만약에 가면 진짜로 군인들이 와서 진압을 하면서 형들 다 끌려갈 것이고 죽을 것인데···” 라는 생각에서 총을 들고 YWCA 정문을 총을 들고 지키다가 계엄군에게 생포되고 말았으니, 순진무구한 소년의 참다운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과 행위도 위대하지만 병든 몸으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5·18과 민주주의의 유적을 모두 사진에 담았던 작가정신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김향득의 탁월한 정의로운 마음이었다.
만날 때마다 건강하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도 큰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이제 영원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의인을 잃은 나의 마음은 참으로 아프기 그지없다. 향득 군! 이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편히 쉬게나.
1980년 5월 민주항쟁 기간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투사회보’를 뿌리며 항쟁의 대열에 참여했던 소년투사였으나, 계엄군이 광주로 재진입한다는 소식을 듣자 총을 들고 YWCA 시민군 결집장소의 정문을 지킨 무장시민군으로 광주의 새벽을 지켜내다 끝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던 소년 ‘폭도’였다.
1962년생인 김 군은 1979년 광주 대동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그때 나는 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김 군은 같은 학년 친구들과 함께 정부정책(유신시대)에 반대하는 시위를 교내에서 감행했었다. 그날이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데모 주동자로 7~8명이 수사당국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조사를 받았다. 퇴학당하고 구속되는 등 온갖 고생이 기다리던 때,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때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가 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모두 풀려났고 조사를 받게 되어 있던 나도 아무런 일이 없고 말았다. 그런 행운도 다 있었다.
고문으로 몸이 위험해지자 2개월 만에 김향득은 출소했다. 그는 병을 앓으면서 학교에 다녔고 학교에서 배운 사진 기술로 사진작가가 되어 5월 이후의 광주·전남 민주화 역사를 앵글에 담기 시작했다. 수만 장의 사진을 남겼다니 그의 애국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영창에서 얻은 고문으로 인한 병은 끝내 그에게 파킨슨병으로 옮겨졌고, 병을 앓으면서도 그는 사진찍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2023년 4월 중순 자택에서 쓰러져 폐렴과 신우신염 진단을 받고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서 2년이 넘도록 신음하다 지난달 끝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오호 통재로다!
김 군은 고교생 시절부터 사회과학 서적 등을 탐독했고 독서회에 가담하여 많은 책을 읽으면서 유신독재에 맞서야 한다는 저항의식을 키웠다고 한다. 5월 26일 계엄군이 재진입하면 시민군은 모두 죽을 수밖에 아무런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죽기로 각오한 대학생 시민군들은 어린 학생들은 모두 귀가하라고 강하게 요구했지만, 새벽을 지킨 소년들은 거짓말까지 하면서 도청과 YWCA를 지키는 위대한 5·18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였다.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자는 위대한 희생정신을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 얼마나 거룩한 희생정신인가. 죽기는 싫고 살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마음이다. 그런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고 죽음을 택한 장엄한 애국심,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던 애국선열들과 무엇이 다른가.
선배 대학생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왠지 나 혼자 가기가 쑥스러웠어요. 만약에 가면 진짜로 군인들이 와서 진압을 하면서 형들 다 끌려갈 것이고 죽을 것인데···” 라는 생각에서 총을 들고 YWCA 정문을 총을 들고 지키다가 계엄군에게 생포되고 말았으니, 순진무구한 소년의 참다운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과 행위도 위대하지만 병든 몸으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5·18과 민주주의의 유적을 모두 사진에 담았던 작가정신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김향득의 탁월한 정의로운 마음이었다.
만날 때마다 건강하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도 큰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이제 영원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의인을 잃은 나의 마음은 참으로 아프기 그지없다. 향득 군! 이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편히 쉬게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