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문화공간, 도시의 미래가 되다] 천년 중세도시 착륙한 UFO…지역 화합 부른 ‘예술 프로젝트’
(9) 오스트리아 그라츠 현대미술관
무어강 경계 동·서로 나뉜 그라츠, 빈부 격차로 수십년 갈등
문제 해결 위해 예술 프로젝트 진행…2003년 현대미술관 개관
해삼 연상 시키는 독특한 건축물, 중후한 중세도시 이미지 바꿔
파격적 외향 유럽 핫이슈 부상…‘한번쯤 가봐야 하는 곳’ 인기
건물 외벽에 930개 전구, 매일 밤 환상적인 미디어 향연 선물
트렌디한 전시·아방가르드 건축 등 ‘온리 온’ 콘텐츠 인기
2025년 11월 09일(일) 19:45
그라츠 구 도심에 자리한 현대미술관은 얼핏 해삼이나 연체 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외관이 인상적이다.
비엔나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도시가 나온다. 오스트리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자 슈타이어마르크주의 주도인 그라츠(Graz)다.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는 이들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의 도시다. 그도 그럴것이 많은 관광객들이 비엔나를 찍고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가느라 (그라츠를)건너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라츠의 구 시가지는 중세시대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가장 오스트리아다운 도시’다. 인구 25만 명의 중소도시이지만 지난 2003년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될 만큼 중부 유럽의 전통양식과 화려한 인프라를 품고 있다.

그라츠 중앙역에서 빠져 나오면 넓은 광장을 지나 세월의 두께가 묻어있는 오래된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하늘을 향해 뽀쪽하게 솟아있는 고딕양식에서부터 붉은색 지붕이 인상적인 오래된 건물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도심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멀리서도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뽐내는 클락타워(Clock Tower)와 시청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유독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그라츠 현대미술관(Kunsthaus Graz, 이하 현대미술관)이다. 새끼 하마나 해삼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외관이 신기한 듯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아름다운 건축미와는 거리가 먼 건축물은 그라츠의 이미지를 180도 바꿨다. 지난 2003년 무어강을 바라보며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오스트리아는 물론 유럽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초창기 건물의 콘셉트를 둘러싼 논란를 딛고 지역화합의 아이콘이자 오스트리아의 명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중세도시에 착륙한 ‘친절한 외계인’(Friendly Alien)이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시간이었다.

건물 외벽에 설치된 930개의 전구는 그라츠의 야경을 화려하게 수놓는 미디어캔버스이다.






현대미술관은 그라츠가 도시의 미래를 내걸고 추진한 회심의 카드였다. 무어강을 경계로 동과 서로 나뉜 그라츠는 지역간 빈부격차가 심해 수십 여 년 동안 시민들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해발 473m의 슐로스베르크 언덕을 중심으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쪽은 고급 주택가와 대학, 상가들이 밀집된 중심지였다. 반면 서쪽은 노동자와 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고 공장, 제련소 등이 빽빽한 회색지대였다.

두 지역의 갭(gap)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그라츠시가 내놓은 대안은 ‘예술’이었다. 서쪽 지역의 주민들에게 문화를 통해 자긍심과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켜든 것이다. 일찍이 1980년대부터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의 풍부한 문화인프라에 맞설 현대미술관을 건립을 추진했지만 정권 교체와 시민단체의 반대로 두차례 무산된 전력이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0년 대 말, 세번째 도전은 빅 프로젝트와 맞물려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럽문화수도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그라츠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복합문화시설의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여 여론 수렴에 나섰다. 낙후된 서쪽에 미술관을 유치해 균형발전을 꾀한 시의 전략은 문화를 넘어 정치·사회적 통합을 바라는 지역사회를 공론의 장으로 불러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된 2003년 서쪽의 렌드(Lend)지구에 현대미술관이 완공되면서 수십년 간의 숙원사업이 결실을 보게 됐다.

하지만 베일을 벗은 미술관은 개관과 동시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 클라우스 카다 등을 제치고 영국 건축가 피터 쿡(Peter Cook)과 콜린 푸르니에(Colin Fournier)가 디자인한 ‘작품’은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한 파격적인 외형이었기 때문이다. 15개의 촉수를 가진 거대한 연체 동물이나 외계 생명체 같은 모습은 지역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라츠 현대미술관의 전시장 내부 모습.






현대미술관의 랜드마크 논란은 오스트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등 핫이슈로 부상했다. 그라츠의 정체성을 깨뜨린 UFO라는 반대 여론에 맞서 노후화된 도시에 역동적인 에너지를 퍼뜨리는 미래 지향적인 건물이라는 건축계의 호평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한번쯤 가봐야 하는 유니크베뉴(uniquevenue)’로 알려지면서 비엔나를 찾는 관광객들이 그라츠로 몰려드는 반전이 펼쳐졌다.

그래서인지 미술관 앞에 서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 설렌다. 멀리서 보면 꽤 위압적인 느낌의 건물이지만 4층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면 주변의 유서깊은 건축물과 제법 조화를 이뤄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두 건축가의 내공을 보여주는 설계로, 자칫 둔탁해 보이는 외형을 유선형으로 디자인해 도심에 살포시 내려 앉은 비행선을 떠올리게 한다. 건물 외피는 15㎜의 투명한 청색 아크릴판 1288개로 둘러싸여 있고 지붕에는 15개의 촉수가 바깥의 햇볕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채광창 역할을 한다. 어두컴컴한 전시장을 둘러 보다가 잠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차츠의 상징인 슐로스베르크 언덕 위의 시계탑과 고건축물들이 한폭의 풍경화 처럼 다가온다.

현대미술관 인근에 자리한 ‘무어인젤’은 그라츠의 동·서 지역을 잇는 다리이자 섬이다.






인상적인 건, 건물 외벽에 설치된 930 여 개의 전구다. 구도심을 바라 보고 있는 동쪽면은 개별적인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도록 설계돼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투영할 수 있는 캔버스로 활용된다. 유선형의 곡면 스크린에 펼쳐지는 다양한 작품들은 매일 밤 그라츠 시민들을 환상적인 미디어 향연으로 초대한다.

현대미술관은 기존의 미술관과 달리 자체 소장품이나 상설전시실이 없는 독특한 공간이다. 하지만 건축, 디자인, 뉴미디어, 영화, 사진 등 다양한 장르와 트렌디한 전시 연출이 돋보이는 기획전으로 국제 미술현장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아방가르드한 건축물을 전시의 일부로 과감히 끌어 들여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온리 원’의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라츠 현대미술관 1층에는 카페와 아트숍 등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03년 그라츠 시는 또 하나의 야심찬 카드를 내놓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현대미술관의 ‘안착’에 자신감을 얻게 되자 2003년 유럽문화수도 선정 기념으로 시민들을 위한 문화쉼터로 ‘무어인젤’(murinsel)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현대미술관에서 도보로 2~3분 거리에 위치한 무어인젤은 무어강 위에 떠 있는 길이 47m, 폭 20m의 인공 구조물로 도시의 동, 서 지역을 잇는 다리이자 섬이다.

오스트리아의 평범한 도시였던 그라츠는 지난 2011년 유네스코 디자인 창의도시에 선정되는 쾌거를 거뒀다. 문화도시이자 창의도시로 그라츠의 미래를 바꾼 건 바로 현대미술관과의 시너지 효과였다. 지금의 그라츠를 키운 8할은 ‘친절한 외계인’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라츠=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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