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빨강에 대하여 - 김향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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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산책로의 가장 높은 지점, 팔작 기와지붕 아래 평평하고 널찍한 마루가 놓인 작은 정자이자 쉼터이다. 예전에는 그저 반환점이었을 뿐이지만 어느 때부턴가 나도 그곳의 단골이 되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엿듣기’의 재미.
그곳은 언제나 이야기로 가득하다. 두서넛씩 모여 수다를 떨기도 하고 혼자 앉아 전화를 받는 사람도 있다. 더러 비어있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새와 바람과 구름이 찾아와 자리를 메운다. 나는 쉬는 척 무심한 척 앉아 있지만 사실은 두 귀를 쫑긋한 채다. 오늘은 나이가 스무 살도 더 차이 난다는 어느 연예인의 결혼 이야기를 솔깃하며 들었고 부부의 토닥거리는 말씨름을 조마조마 따라가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 노인의 노래를 깜짝 반기며 들었다.
“Take Me Home, Country Roads.”
여고 1학년 때 갓 부임해온 영어 선생님에게서 처음 배운 팝송이었다. 그 노랫말이며 교실의 분위기, 선생님의 표정까지 단박에 떠올랐다. 내 눈과 귀는 온통 노인에게 쏠렸다.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흥취가 번져 있었고 노랫소리는 감미롭고 부드러웠다. 세월은 체구를 줄이고 주름을 늘렸지만 청춘의 흔적은 여전히 가슴께를 울리고 있는 듯했다.
유난히 내 눈길을 붙잡은 것은 그의 빨간 모자였다. 나이 든 육신 위에 얹힌 선명한 빨강은 시간에 맞서는 작은 반역처럼 보였다. 문득 그런 모자 하나가 더 겹쳐왔다. 길모퉁이에 트럭을 세워 놓고 과일을 팔던 노인. 그의 머리 위에도 언제나 빨간 모자가 있었다. 색이 조금 바랬거나 선명하거나의 차이만 있을 뿐 늘 붉은 계열의 모자였다. 그 부조화의 조화는 어느덧 그만의 표식으로 부상했다. 눈에도 잘 띌 뿐만 아니라 심연의 불씨처럼, 혹은 삶의 의지처럼 그의 매무새를 완성해 주었다.
또 한 사람, 엄마도 있었다. 엄마도 유독 붉은색에 마음을 두셨다. 당신뿐 아니라 내 옷에도 꼭 하나쯤은 빨강을 덧입히려 하셨다. 늦게 낳은 자식이라 더 그러셨던 걸까. 나는 늘 회색이나 검정에 마음이 끌렸지만 그럴 때마다 당신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어렸다. 한없이 걱정스럽기만 한 딸아이의 모습이, 다만 피어나는 꽃처럼 생기 넘치기를 바라셨으리라. 하지만 나는 ‘촌스럽다’고 툴툴대기 일쑤였다.
내려오는 길, 풀숲에 꽃무릇이 환했다.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는데 여기저기 꽃 천지였다. 화사하게 솟아오른 붉은 꽃송이가 아직은 푸른 것들 속에 움쑥움쑥 피어나는 중이었다. 잎도 없이 꽃대만 쑥쑥 올라와 빛살처럼 퍼지는 선연한 빨강이었다. 영글고 익어가는 사라짐과 쇠락의 계절 위에 향연처럼 피는 꽃. 봄의 장미가 생의 절정에서 터져 오르는 붉음이라면, 가을의 꽃무릇은 사라짐의 문턱에서 다시 피는 붉음이다. 하나는 시작의 불꽃이고 하나는 끝의 불씨 같다.
빨강은 어쩐지 울컥 하게 되는 색이다. 스스로를 단념하지 않는 색. 사라짐 속에서도 다시 피어나고, 지는 순간에서도 놓지 못하는 색이다. 시간의 쇠락을 거슬러 나를 확인하는 기호, 소멸과 탄생이 맞닿은 근원적인 색이다. 삶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최후의 문장 같은 것. 기쁨과 슬픔, 그 모든 순간을 꿰뚫는 하나의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빨강일 것이다.
빨강은 또한 극단의 색이다. 사랑과 분노, 열정과 위험, 탄생과 죽음. 서로 다른 극단들이 동시에 번져 나오는 색. 그것은 피의 색이자 새벽 태양이 지평선을 가르고 솟아오를 때의 색이다. 그리고 저녁의 색이다. 태양이 하루를 접고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의 색. 그래서일까. 인생의 어느 시점이 되면 사람은 다시 빨강을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았음을,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은 무언의 항거처럼.
언제부턴지 나도 은근히 빨강에 끌린다. 무채색의 옷만 고집하던 내가, 안전한 흑백의 울타리에 숨어 지내던 내가, 이제는 그 경계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 과장된 빛깔이, 촌스럽다고 여겼던 그 붉음이, 마치 깊이 숨어 있는 용기처럼,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다가온다. 오래 잠들어 있던 내 안의 불꽃을 다정히 깨우는 것처럼.
누군가 모자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 빨강을 집어 들게 되지 않을까.
그곳은 언제나 이야기로 가득하다. 두서넛씩 모여 수다를 떨기도 하고 혼자 앉아 전화를 받는 사람도 있다. 더러 비어있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새와 바람과 구름이 찾아와 자리를 메운다. 나는 쉬는 척 무심한 척 앉아 있지만 사실은 두 귀를 쫑긋한 채다. 오늘은 나이가 스무 살도 더 차이 난다는 어느 연예인의 결혼 이야기를 솔깃하며 들었고 부부의 토닥거리는 말씨름을 조마조마 따라가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 노인의 노래를 깜짝 반기며 들었다.
여고 1학년 때 갓 부임해온 영어 선생님에게서 처음 배운 팝송이었다. 그 노랫말이며 교실의 분위기, 선생님의 표정까지 단박에 떠올랐다. 내 눈과 귀는 온통 노인에게 쏠렸다.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흥취가 번져 있었고 노랫소리는 감미롭고 부드러웠다. 세월은 체구를 줄이고 주름을 늘렸지만 청춘의 흔적은 여전히 가슴께를 울리고 있는 듯했다.
또 한 사람, 엄마도 있었다. 엄마도 유독 붉은색에 마음을 두셨다. 당신뿐 아니라 내 옷에도 꼭 하나쯤은 빨강을 덧입히려 하셨다. 늦게 낳은 자식이라 더 그러셨던 걸까. 나는 늘 회색이나 검정에 마음이 끌렸지만 그럴 때마다 당신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어렸다. 한없이 걱정스럽기만 한 딸아이의 모습이, 다만 피어나는 꽃처럼 생기 넘치기를 바라셨으리라. 하지만 나는 ‘촌스럽다’고 툴툴대기 일쑤였다.
내려오는 길, 풀숲에 꽃무릇이 환했다.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는데 여기저기 꽃 천지였다. 화사하게 솟아오른 붉은 꽃송이가 아직은 푸른 것들 속에 움쑥움쑥 피어나는 중이었다. 잎도 없이 꽃대만 쑥쑥 올라와 빛살처럼 퍼지는 선연한 빨강이었다. 영글고 익어가는 사라짐과 쇠락의 계절 위에 향연처럼 피는 꽃. 봄의 장미가 생의 절정에서 터져 오르는 붉음이라면, 가을의 꽃무릇은 사라짐의 문턱에서 다시 피는 붉음이다. 하나는 시작의 불꽃이고 하나는 끝의 불씨 같다.
빨강은 어쩐지 울컥 하게 되는 색이다. 스스로를 단념하지 않는 색. 사라짐 속에서도 다시 피어나고, 지는 순간에서도 놓지 못하는 색이다. 시간의 쇠락을 거슬러 나를 확인하는 기호, 소멸과 탄생이 맞닿은 근원적인 색이다. 삶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최후의 문장 같은 것. 기쁨과 슬픔, 그 모든 순간을 꿰뚫는 하나의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빨강일 것이다.
빨강은 또한 극단의 색이다. 사랑과 분노, 열정과 위험, 탄생과 죽음. 서로 다른 극단들이 동시에 번져 나오는 색. 그것은 피의 색이자 새벽 태양이 지평선을 가르고 솟아오를 때의 색이다. 그리고 저녁의 색이다. 태양이 하루를 접고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의 색. 그래서일까. 인생의 어느 시점이 되면 사람은 다시 빨강을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았음을,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은 무언의 항거처럼.
언제부턴지 나도 은근히 빨강에 끌린다. 무채색의 옷만 고집하던 내가, 안전한 흑백의 울타리에 숨어 지내던 내가, 이제는 그 경계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 과장된 빛깔이, 촌스럽다고 여겼던 그 붉음이, 마치 깊이 숨어 있는 용기처럼,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다가온다. 오래 잠들어 있던 내 안의 불꽃을 다정히 깨우는 것처럼.
누군가 모자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 빨강을 집어 들게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