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이 지낸 보통의 하루 - 장석주 시인
2025년 10월 31일(금) 00:20
며칠 전 서울역에서 KTX 열차를 기다리다가 역내에서 먹잇감을 찾는 연회색 비둘기 두 마리를 보았다. 한 남자가 빵 부스러기를 던지자 비둘기 두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달려든다.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은 비둘기들은 다른 먹잇감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린다. 비둘기가 몸집이 아무리 작아도 빵 부스러기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역 구내를 영역으로 삼은 비둘기 두 마리를 바라보며 먹고 사는 일의 고달픔에 생각이 미친다.

한강변에서 비둘기 떼에게 먹이를 주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었다고 나를 호통을 친 이들은 한강변의 낚싯꾼들이다. 그들은 비둘기가 낚싯줄을 엉키게 한다고 짜증을 내며 항의를 했다. 천적이 없는 탓에 개체 수가 부쩍 증가한 비둘기들은 현대도시의 골칫거리다. 사람들이 비둘기를 혐오 동물로 낙인찍은 지 오래다.

어디에서나 미움을 받는 비둘기의 처지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비둘기에게 밀려난 자의 슬픔이란 감정을 헤아릴 만한 사리분별이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경고를 들을 때 난감해진다. 이내 비둘기를 도시로 불러들인 장본인은 사람들이 아닌가 라고, 나는 의구심을 품은 채 반문한다. 비둘기가 굶어 죽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 영문도 모른 채 찍힌 혐오 낙인과 가혹한 처우에 동의하지 않지만 내게는 비둘기와 사람이 공존할 방안을 내놓을 지혜가 없다.

지혜가 모자란 나는 자주 시집을 읽는다. 시집에서 뜻밖의 지혜를 발견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칠레 남부에서 태어난 시인 니카르노 파라의 시집에서 “각각의 새는 진정 날아다니는 묘지다”란 싯구가 기억에 남는다. 새들이 공중의 묘지라면 사람은 걷는 묘지라고 할 테다. 한 번 태어난 새는 죽고, 피어난 꽃들은 시든다. 시집을 읽으며 사람이 근심과 갈애의 총애를 받는 존재라면 장미꽃들은 미와 덧없는 시듦의 총애를 받는 존재라는 기특한 생각을 떠올린다.

오늘의 하늘은 청명했다. 김밥 한 줄을 싸들고 공원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치과 예약이 있어서 포기했다. 치과에 가서 치석을 제거하고, 손님 없는 동네 카페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다가 돌아온다. 휴대폰 기종을 새로 바꾸고, 실손 보험을 들라는 권유를 받아들였다. 내일이란 미지의 사건과 사고를 품은 심연이다. 아침에 출근한 사람이 저녁에 주검으로 돌아온다. 현대 세계의 악덕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뜻밖의 사태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이런 변고에 대응을 해야 하는 까닭에 보험업이 그토록 번창하는 것이다.

가을빛은 유순하고, 햇볕은 따사롭다. 동네 느티나무의 단풍 든 잎은 며칠 전까지 노랗다가 지금은 온통 주황색이다. 가을이 깊어진 게 실감난다. 오늘은 별 일이 없던 보통의 하루다. 그 하루를 보내며 딸들은 빨리 자라고 우리는 늙는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딸은 태평양 건너 먼 곳에 가 있고, 나는 가을이면 억새와 산국이 피는 한국에 산다. “인간의 삶이란 먼 곳의 몸짓”(니카르노 파라)이라면 누구의 삶도 그저 먼 곳의 몸짓에 지나지 않으리라. 어제나 오늘의 삶이란 다만 먼 곳에의 몸짓일 뿐이다.

비둘기는 구박덩어리인 채로 도심 공원이나 역 근처를 떠돌며 먹이를 구하는데 여념이 없을 테다. 활엽수의 낙엽은 비처럼 쏟아진다. 고개를 들면 기러기 떼는 먼 하늘에서 끼룩끼룩 울며 나는데, 가을의 공기에서는 군밤 냄새가 떠돈다. 누군가 코를 킁킁거리며 그 냄새를 맡는다. 우리는 숭고함도 비범함도 없는 보통의 날들을 보내며 새로운 내일을 맞는다. 쇠락, 재와 무, 묘비명을 남길 내일을 앞두고, 아, 오늘은 기쁨도 고통도 없는 하루를 보냈구나, 한다. 나는 비염이 도져 재채기를 몇 번 했을 뿐 가을은 덧없음으로 왔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당신은 잘 있는가? 어디에 있든 부디 잘 사시라. 심심하게 보낸 가을의 하루를 먼 옛날인 듯 아득하게 돌아보며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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