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 자체-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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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에서 지난 10월 10일부터 18일까지 필자를 포함해 10여명의 사제들이 동티모르를 방문했다. 아시아의 작은 섬나라인 동티모르는 한국에 약 7천여명의 이주노동자를 송출하고 있다. 방문 목적은 단순한 탐방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이유와 과정을 거쳐 낯선 한국 땅으로 오게 되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 송출 과정과 노동 환경, 그리고 그 이면에 깃든 고통과 희망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해서였다.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한 동티모르는 독립 이전, 인도네시아군과 반독립 민병대의 충돌로 국가 인프라의 70% 이상이 파괴되었다. 학교는 물론, 병원과 공장 등과 같은 기반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그 여파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발전의 기반은 거의 사라졌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녀의 학비를 위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그들은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면서 미지의 땅으로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떠난다. 이것이 이들이 선택한 ‘이주노동’의 현실이었다.
한국에서 노동을 마치고 귀국한 이들을 만났다. 낯선 땅에서 익힌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려 하지만 여전히 기반 시설이 없는 현실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눈빛 속에는 희망의 불씨도 볼 수 있었다. 본국으로 귀국한 이들이 한국문화원과 같은 단체를 만들어 한국으로 가고 싶은 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 단체 중에 한 곳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단체복을 입은 이들이 있었는데 그 옷에는 다음과 같은 한국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제 꿈이 한국에 가고 싶어요.”라는 문법이 맞지 않은 문장,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경제적 욕망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이었고, “조금 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고백이었다.
그들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삶 그 자체’를 이어가기 위한 희생이었다. 이주노동자 젊은이들이 새벽부터 길을 나서 공장으로, 농장으로, 어선으로 향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 그리고 꿈 때문이다.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노동의 현장으로 향하는 몸짓은 지친 몸과 마음을 이겨내는 희망이다.
이주노동자의 삶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종종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묻지만, 정작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는 잊고 있는지 모르겠다. 돈을 벌기 위해, 지위를 얻기 위해, 명예를 쫓기 위해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삶 그 자체’의 의미를 놓치거나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다음의 마태오 복음 16장 26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동티모르의 이주노동자들은 비록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왔지만 한국에 와서 새로운 삶을 펼쳐나가고 있다. 삶 그 자체를 살아가는 이유를 알아가고 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삶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현실에 감사하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과 나라 공동체를 위해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가난하지만 그 마음은 풍요롭다. 그들의 희생 안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이주노동자의 땀방울은 단지 생계의 수단으로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씨앗이고, 가족들을 살아가게 하고, 동티모르의 미래를 밝히고, 한국과 동티모르를 잇는 중개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한국 사회에 “당신은 삶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라고 삶의 화두까지 던지고 있다. 결국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지 돈이나 물질 같은 어떤 무엇을 가지거나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이나 부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로 부르셨다. 살아 있는, 사랑할 수 있는,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자로 부르셨다. ‘삶 그 자체’를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을 통해 삶의 고귀함을 배운다.
그 단체 중에 한 곳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단체복을 입은 이들이 있었는데 그 옷에는 다음과 같은 한국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제 꿈이 한국에 가고 싶어요.”라는 문법이 맞지 않은 문장,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경제적 욕망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이었고, “조금 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고백이었다.
그들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삶 그 자체’를 이어가기 위한 희생이었다. 이주노동자 젊은이들이 새벽부터 길을 나서 공장으로, 농장으로, 어선으로 향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 그리고 꿈 때문이다.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노동의 현장으로 향하는 몸짓은 지친 몸과 마음을 이겨내는 희망이다.
이주노동자의 삶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종종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묻지만, 정작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는 잊고 있는지 모르겠다. 돈을 벌기 위해, 지위를 얻기 위해, 명예를 쫓기 위해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삶 그 자체’의 의미를 놓치거나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다음의 마태오 복음 16장 26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동티모르의 이주노동자들은 비록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왔지만 한국에 와서 새로운 삶을 펼쳐나가고 있다. 삶 그 자체를 살아가는 이유를 알아가고 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삶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현실에 감사하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과 나라 공동체를 위해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가난하지만 그 마음은 풍요롭다. 그들의 희생 안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이주노동자의 땀방울은 단지 생계의 수단으로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씨앗이고, 가족들을 살아가게 하고, 동티모르의 미래를 밝히고, 한국과 동티모르를 잇는 중개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한국 사회에 “당신은 삶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라고 삶의 화두까지 던지고 있다. 결국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지 돈이나 물질 같은 어떤 무엇을 가지거나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이나 부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로 부르셨다. 살아 있는, 사랑할 수 있는,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자로 부르셨다. ‘삶 그 자체’를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을 통해 삶의 고귀함을 배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