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중섭 소설가
2025년 10월 20일(월) 00:20
새벽, 잠에서 깨었다. 화장실에 다녀와 시간을 보니 다섯 시 반이었다. 창밖을 보니 아직 어두웠다. 무엇을 하나? 노트북만 올려놓으려 장만한 긴 책상 위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약 처방전, 재산세 청구서, 읽다 놓아둔 소설책들이 노트북 주위에 산만했다.

지금 당장 읽을 만한 책이 있나 책장을 둘러보았다. 책장에 꽂힌 얼굴들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지만, 선뜻 손이 가는 것은 없었다. 이리저리 뒤적이다 책장 안쪽 책들 틈에서 오래된 제본용 대학 교재를 발견했다. 대학 시절 복삿집에서 팔던 얇은 교재였다. 하늘색 표지로 코팅된 하인리히 뵐의 짧은 소설이었다.

‘오호, 그래, 좋다. 한번 보자.’ 책을 빼어 들고 얼른 침대에 누웠다. 작품이 궁금했다. 스마트폰 속 AI에게 제목을 읽어주었다.

“제니! Was soll aus dem Jungen bloß werden이 무슨 뜻이야?”

오랜 사진 속 연인의 근황을 알고 싶은 것처럼 마음이 조금 설렜다. 제니가 대답 대신 긴 자료를 좍 긁어와 화면에 펼쳤다. 그다음, 외워 온 것을 읊어대는 것처럼 다다닥다다닥,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다시 읽을 테니 잘 들어 봐!”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독일어를 발음했다. 그녀는 물어보는 데도 말을 그치지 않고 조잘조잘 읊고 있었다. 처음 사용하는 AI라 당황스러웠다. 어, 이걸 어떻게 중단시키고 다시 듣게 하지? 몇 번 버벅거리다 겨우 녀석의 입을 막았다. 이전에도 몇 번 시도했지만 약간 두렵고 어색해 그만두었다. 제니는 내 중얼거림을 듣고 다시 혼잣말을 죽 기계처럼 읊어댔다.

“혹 독일어이면 어쩌고….”

이 말이 귀에 들렸다. 뭐지? 하면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 문장으로 써줘 보자. 그러면 확실할 것 같았다. 독일어로 소설 제목을 입력했다. 그런데 다른 단어는 영어 자판을 써도 되는데 이 bloß의 마지막 글자 ß을 써넣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bloß는 blo만 써넣고 물었다.

“워스 …”

제니가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단어 발음이 워스라니? 워스는 영어잖아? 바스로 읽어야지. 제니는 계속 워스라 발음하더니 혹 독일어이면 어쩌고저쩌고하며 씨부렁댔다. 헐, 내가 아무리 독일어를 못한다고 해도 was를 워스로 발음하다니. 혹 독일어를 공부하던 시간이 너무 흘러 그 시절 우리가 알던 발음이 짝퉁이었나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분명 바스였다. 문득, 제니가 독일 소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을 수도 있으며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정보가 축적되었거나 저장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천재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이, 때려치우고 이 기회에 독일어 공부나 해볼까, 하며 외국어 회화 앱에 독일어를 추가했다. 기초부터 독일어 회화를 시작했다. 재미있으면서 체계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점점 흥미롭고 새로웠다.

창밖을 보니 완전히 날이 밝았다.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산책하러 나갔다. 삼십 분쯤 걷다가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고 보다만 대학 교재 제목을 검색해 보았다.

‘그 소년이 어떻게 될 것인가?:책들과 관계있는 어떤 것’은 1933~37년에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여 쓴 하인리히 뵐의 짧은 소설이다. 이 작가는 197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 무고한 여성이 언론의 횡포에 의해 사회로부터 매장되어 가는 과정을 담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영화화되어 크게 흥행했다고 검색창에 떴다.

그 밑으로 발음 설명이 이어졌다. Was는 ‘바스’가 맞았다. werden은 ‘바덴’으로 나왔다. 엄혹한 1980년대에 벽돌담 3층 건물 강의실에서 werden을 ‘베르덴’으로 당당하게 읽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냥 활자 자체로만 읽던 시절이었다. 콩글리시란 단어가 떠올랐다. 이에 상응한 독일어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독일인들은 뎅글리시라 부르는데 독일어와 영어를 조합해 놓은 단어다.

대학 시절, 캠퍼스 안 자욱한 최루탄 냄새, 공허한 오후, 인문대 적색 벽돌 건물 강의실, 여자 교수의 카랑카랑한 발음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울렸다.

“아인스, 츠바이! 아인스, 츠바이!”

소설 속에서 독일 소년들이 하나, 둘! 하나, 둘! 을 반복하며 열병식을 연습한다. 여자 교수가 아인스, 츠바이를 외치는 소리가 강의실 안에서 높게 울려 퍼진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생각나는 침묵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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